북한에 이산가족 둔 김예철씨
함경도에서 태어난 김예철씨(84)는 1946년 학교에 다니기 위해 홀로 서울에 내려와 있던 중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평생 가족과 헤어져야 했다. 그는 또 1996년 헤어진지 50년만에 어머니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오른다고 말했다.
어머니와 동생들을 다시 만나기까지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가 어머니와 서신을 교환하던 1993년부터 북미 관계 악화로 교류가 차단된 것. 다른 길이 없을까 애태우다가 ‘편법’을 써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했다. 이북에는 해마다 4.15 축전이라는 게 있어. 미주 한인 예술인단체에 한해 방문을 허용하더라고. 나는 동부대표의 스폰서 자격으로 들어갔지. 물론 상봉이 가능하다는 언질을 받고 들어갔다고 했다. 무턱대고 들어갈 순 없는 일이지. 비용도 만만치 않지만 막상 들어갔다가 가족 얼굴도 못보고 돌아오면 얼마나 기막히겠어.
김 할아버지는 1996년 50년만에 어머니를 다시 뵜을 때 처음엔 다른 사람이 나온 줄 알았다고 했다. 가서 만나보니 웬 호호할머니가 앉아있더라고. 내 기억으론 참 고운 분이었으니 뭔가 착오가 생긴 줄로 알았지. 그런데 어머니 눈매가 옛날 그대로여서 알아볼 수 있었어요. 당시 연세가 90살이셨는데 지난 기억 모두 간직할 정도로 정정하셔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
어머니는 50년만에 장남을 다시 보고는 이제 여한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든 내년에 다시 찾아뵈야겠다’ 마음을 먹고 방법을 알아보고 있던 중 북한에서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아들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 그 때까지 버티셨던 게지. 목소리가 잦아들면서도 난 엄청나게 운이 좋은 사람이라며 감사해 했다.
김 할아버지의 첫째 동생은 몇년전 세상을 떠난 상태고 현재 함경도에 여동생과 막내 남동생이 생존해있다. 그는 지난 10여년간 북한에 기근이 들어 함경도도 먹고 살기 굉장히 어려웠다고 들었다면서 그래도 미국에 있는 큰 형이 조금씩 보태줘서 어려운 고비 넘길 수 있었다는 편지를 받게 돼 기쁘다고 웃었다. 요새는 조금 나아진 모양이야. 작년이랑 재작년에 대풍이 들었다고 했거든. 나이가 들어서도 걱정거리가 사라지지 않고 있지만 그에게는 그것 또한 살아가는 기쁨인 듯 했다. <봉윤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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