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인타운에서 노인들이 자살하는 사건이 점점 늘고 있다. 80년대만 하더라도 한인타운에서 노인이 자살했다 하면 큰 뉴스로 취급 됐었는데 자주 일어나다 보니 지금은 별로 뉴스가 아닌 것처럼 작게 보도되고 있다. 기사 내용을 보면 “82세의 김할머니는” “80세의 박할아버지는” 운운으로 시작되어 끝에 가서 자살 원인이 ‘우울증’인 것으로 분석되어 있다.
왜 우울증에 걸렸을까. 이것이 문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앞으로 노인이 될 사람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나의 거울이다. 석가모니는 싯다르타 왕자 시절 이가 빠지고 주름이 패인 노인을 보고 이렇게 한탄했다. “인간은 젊음의 자만심에 취해 늙음을 보지 못하는구나. 지금 내 안에 미래의 노인이 살고 있도다”
노인들의 우울증은 자신이 버려진 존재,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이라는 것, 특히 자식들에게 부담만 준다는 자책감이 일반적인 원인이다. 여행도 60대와 70대에서나 신이 나는 것이지 80이 넘으면 여행도 귀찮아지는 모양이다. 책읽기도 싫어지고 심하면 라디오 듣는 것도 피하게 된다고 한다. 기도 내용도 70대까지는 “주여, 건강을 주옵소서”하다가 80대가 넘으면 “주여, 하루 빨리 데려가 주옵소서”로 바뀐다고 100세 넘은 어느 할머니의 수기가 밝히고 있다.
돈이 있어도 80이 넘으면 의미가 없어진다. 헤밍웨이가 돈이 없어 자살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는 백만장자였다. 그러나 고독했다. 고독하지 않은 노인, 그가 바로 행복한 노인이다.
노인이 어떻게 늙어야 하는가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에 답이 나와 있다. 주인공 장발장은 손녀 코세트의 애인을 구하고 두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둔다. 젊은 사람들을 도와주고 그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인생을 마감하는 80대의 인생이다. 장발장은 외롭지 않았다. 그는 늙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노력한 사람이며 젊은이와 어울릴 줄 아는 노인이었다.
고독은 노인 우울증의 주범이다. 목매달아 자살한 한인 노인들에게도 자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녀들은 노인들의 고독에 대해 이해력이 약하다. 육아전서는 있어도 양로전서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현대사회에서 정부가 웰페어를 주어 노인들을 자식과 따로 살게 하는 사회제도의 부작용이 이제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한국의 한 대학교 총장이 스웨덴을 갔는데 노인들이 정부의 복지제도에 대해 항의하는 데모를 TV뉴스에서 보고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정부의 노인복지 제도가 너무 철저해 자식들이 부모를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 항의 내용이었다고 한다. 스웨덴은 노인복지가 완벽한 국가로 유명한데 노인 자살률이 높다. 이는 먹고사는 문제가 노인문제의 전부가 아님을 말해 준다.
이 시대의 진정한 효자는 디럭스 콘도를 사주는 자녀가 아니다. 노인의 고독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다. 어렵게 미국까지 부모를 모시고 왔는데 부모가 자살한다는 것은 자식들에게도 책임이 있지 않을까. 양로원에 있는 노인들이 “자식들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하소연하는 것을 남의 일로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싯다르타의 말대로 ‘미래의 노인이 내 속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
chullee@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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