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취재를 위해 증권업계 종사자인 L씨를 만났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낯설지가 않았다. 악수를 나누면서 “어디서 많이 뵌 분 같은데…”라는 말이 자연스레 나왔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기자는 계속해서 ‘기억의 주파수’를 맞추어보았다. 그리고 “혹시 모 어학원 광고에 모델을 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L씨는 “그래도 광고 효과가 있나 봐요”라고 웃으며 답을 대신했다.
L씨가 어학원 광고에 모델로 출연한 건 1997년. 한국서 갓 유학을 왔던 L씨는 친지가 “가깝게 지내는 어학원 원장이 광고를 찍으려는데 유학생 모델을 찾고 있다”며 부탁을 해 제안을 받아들였다. 돈 한 푼 받지 않고 L씨가 찍은 광고는 21세기가 된 뒤에도 여전히 한인 방송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L씨는 “최근에 어학원 원장을 만날 기회가 있어 ‘10년 가까이 광고 트셨으니 모델료 좀 주시죠‘라고 농담처럼 말했는데, ‘다 아는 사이에 무슨 돈이냐’는 퉁만 되돌아왔어요”라고 말했다.
L씨처럼 한인타운에서는 자신의 초상권을 침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한번 찍은 광고를 10년 넘게 트는 게 예삿일이 돼버렸다. 그러니 출연 모델들은 정당한 대가를 받지도 못한 채 자신의 얼굴이 지면으로, 화면으로 비춰지는 걸 지켜볼 뿐이다.
어디 일반인 초상권뿐인가. 자신의 얼굴과 이미지로 먹고사는 한국 연예인들을 동의도 없이 버젓이 광고에 쓰는 업소도 넘친다. 이들 업소는 “광고 에이전트에서 다 알아서 해 사장인 난 잘 모른다” “연예인과 개인적 친분이 있어서 사진을 썼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답을 한다. 남의 권리를 침범했는데도 죄책감이란 찾기가 힘들다.
최근에 가장 큰 문제가 된 건 상표권이다. 한국의 유명 식당이나 제품 이름을 함부로 사용했다가 소송을 당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다. 간판만 바꿔 달았다면 큰 일도 아니다. 4월에는 NBA, NFL 팀 로고가 부착된 의류를 팔다 경찰에 체포된 의류점 업주도 나왔다.
사이몬 심 IPLA 미국특허사무소 법무사는 “한인들은 상표를 포함한 다른 사람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너무 부족하다”며 “모르고 한 일이라고 해도 남의 권리를 침해한 경우 송사에 휘말리는 것뿐만 아니라 파산에 이를 수도 있다”고 말한다.
내가 잘 살 권리를 위해 남의 어깨까지 밟고 오를 권세는 우리에게는 없다. 서로 어우러져 사는 세상이다. 남의 권리를 인정하는 작은 배려가 한인 사회에 쌓여갈 때, 우리는 얼마나 아름다운 공간에 살게 될까.
김호성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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