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복씨.6,25때 헤어진 대대장. 50년만에 찾아.
지리산 공비 토벌등 죽을 고비서 생명 지켜준 은인.
대대장님 어디 계십니까?
50여 년, 생명의 은인을 찾아 헤매던 한인이 고희를 맞아서야 6.25 전쟁 후 헤어진 대대장과 연결된 감격적인 일이 있어 화제다.
그 주인공은 새크라멘토에 거주하는 김용복(70)씨.
19살의 어린 나이로 경찰에 투신한 그는 전쟁 중에 군과 함께 공비색출에 나섰다가 죽을 고비를 수 차례 넘겼다. 그런 그를 지켜준 사람은 당시 27세였던 장기덕 대대장(현재 77세).
1951년 11월은 인천 상륙 작전이 전개된 후 고립된 공비를 소탕하기 위해 군과 경찰이 합동으로 토벌에 나선 시기였다. 태백산 지구 사령부(207부대) 소속으로 참가하게된 김용복씨는 1차(3개월) 작전동안 공비의 습격과 여름옷 한 벌로 추운 날씨를 견뎌야했던 기억은 악몽이었다고 말했다.
동 작전 중 수 많은 전우들의 죽음을 목격하였으나 두사람이 한 조가 되어 잠복 근무를 하는 도중 바로 옆에서 전우를 잃은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며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긴장하게된다며 몸을 떨었다. 깊은 숲과 험한 바위가 많은 지리산 토벌 작전 때에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불을 피울 수가 없어 마을에서 올라오는 얼은 주먹밥마저도 작전이동으로 연락이 두절되어 굶주려야 했던 상황이었다고 회상했다.
특히 군인보다 병력이 약한 경찰들만 공격하는 공비들의 작전에도 목숨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안전지대의 연락병으로 근무하게 배려해준 장 대대장이었다 한다.
한국에서 25년 동안 경찰과 군인의 길을 걸어온 그는 1974년 도미 이후에도 장 대대장을 찾으려 노력했었다고 설명했다. 그가 장기덕 대대장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한국 국가 보훈처에 근무하는 강성만 계장(50)의 도움이 컸다며 한국의 미래가 밝다는 희망을 강 계장의 봉사 정신에서 발견 할 수 있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강 계장은 “직무상 해야할 일을 했다며 앞으로 교포들이 보훈처의 안내가 필요할 때에는 언제든지 친절히 임하겠다”는 의사를 본보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전해 왔다. 피보다 진한 것이 전우애라며 눈물을 글썽이는 김용복씨는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터의 비극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그의 전화를 받은 장 대대장은 반가움에 눈물을 흘렸다며 한국방문을 서둘러 빨리 뵙고 싶다는 진한 전우애를 나타냈다.
미국에서 25년 철도청 근무로 정년 퇴직한 김영복씨는 현재 부인이 운영중인 세탁소를 도와주고 있다. 부인 김문자(60)씨는 새크라멘토 한인 합창단으로 사회에 봉사하고 있다. 보훈처 전화-(서울)02-2125-0864.
<김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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