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레저
▶ 히말라야 도전 산악인 김예섭씨 후예
탄자니아에 위치한 킬리만자로는 만년설로 유명하며 검은 아프리카 대륙의 최고봉이자 세계 최고의 화산이다. 미 금융계에 몸담고 있는 1.5세 김규선(24)씨는 다리엔 토우, 제시카 앤더슨, 서충길씨 등 3명의 일행을 이끌고 기후 변화가 심한 해발 5,895m의 킬리만자로에 도전, 5박6일간의 원정끝에 정상에 올랐다.
그는 1970년대 초 히말라야 마나슬루봉에 도전했다 목숨을 잃은 김호섭, 기섭 형제의 조카이자 마나슬루 2차 원정에서 조난 당한 15명의 대원들 가운데 유일하게 구조된 김예섭씨의 아들이다.미지의 세계인 킬리만자로 등정을 통한 김규선씨의 도전과 시련 극복 과정을 들어본다. <편집자주>
에베레스트의 정복자 조지 말로리는 왜 산을 오르냐고 묻자 산이 거기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나의 경우 산에 대한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는 산악인의 피가 내 몸 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큰아버지(김정섭)와 세째 삼촌(김호섭), 넷째 삼촌(김기섭), 내 아버지(김예섭)는 1970년대 초반 히말라야에 도전했던 산악인들이었다.
정상을 향한 이들의 의지는 한국 산악사의 역사를 이뤘지만 형제 둘이 히말라야 마나슬루에 묻히고 막내 동생은 뼈가 부러진 상황에서 30시간을 눈 속에 갇힌 고통 끝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비운의 가족사를 남겼다.
죽음을 목격한 생존자의 아들이기에 나는 내 삶이 얼마나 큰 축복을 받았는 지 절감한다.
다섯 살 때 미국으로 이민 와 마나슬루에서 목숨을 잃은 삼촌들과 아버지의 경험담을 듣고 자라면서 언젠가 나도 불가능에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키우면서 살았다.큰아버지(김정섭)를 따라 베어마운틴을 등반하게 됐고 캣츠킬에서 스키를 배우며 미지의 세계를 향한 도전정신을 키워갔다.
그러던 어느날 고등학교 때 알프스 몽블랑 원정팀에 합류하는 기회가 왔다. 몽블랑 등반 전 여러 달 훈련 과정을 거쳐 다리 힘과 심폐 능력을 키우기 위해 등교전 매일 오전 6시30분 같은 코스를 달리며 몸을 다졌다.
잊을 수 없는 몽블랑 등반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나는 계속해서 아침마다 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듬해 여름 대학에 가기 전 나는 해발 1,4255 피트의 콜로라도 롱피크(Long Peak)에 도전했고 대학 졸업 후 직장에 다닐 때 휴가 동안 페루 안데스 산맥을 등반했다.킬리만자로 정상을 향해 나는 조금씩 올라가는 훈련을 하고 있었다.
지난 2년간 뱅크 오브 아메리카 시큐리티에서 금융 분석가로 일한 후 보스턴의 ‘아메리카스 그로스 캐피탈’로 직장을 옮기기 전 킬리만자로 등반 준비에 돌입했다. 지난 2월부터 24층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는 강도 있는 훈련을 마친 후 드디어 7월6일 아프리카 탄자니아로 출발했다.
7월9일 해발 7,000피트의 마차메[(Machame) 게이트에서 포터들을 만나 제 1 캠프를 향해 7시간을 걸어 올라갔다. 가다 보니 산아래 열대 우림지역을 감싸고 있는 진흙투성이의 질퍽한 산길을 만나게 됐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니 물이 6인치 가량 차 올라오는 상황에 달했다.
우리 일행은 게이터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흙탕물을 빠져 나와 해발 1만피트에 자리 잡은 제1 캠프에 도착했다. 캠프에 도착하니 산소가 부족해 호흡이 곤란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고 새벽 2시 텐트를 치는 빗소리에 잠이 깼다.
그 다음날까지 계속 쏟아지는 빗속에 길을 떠난 우리 일행은 몸만 겨우 가리는 비옷 판초를 입고 가파른 암벽 경사지를 오르기 시작했다. 비 때문에 산을 오를수록 날씨가 추워져 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침울한 기분으로 계속 걷고 또 걷다보니 해발 1만2,500피트 선상에 있는 제2 캠프에 도착했다. 모두 비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텐트에 잠시 머물기로 했다.
함께 동행했던 고모부는 예순 셋의 나이에도 헬퍼들 못지 않게 무거운 짐을 챙기며 힘들어하는 기색 없이 길고 긴 원정길을 너무도 잘 견뎌냈다.
7월10일 이곳에 텐트를 치고 밤을 새웠다. 이튿날 잠에서 깨어 보니 검은 구름이 걷히고 푸른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 우리는 일어나자마자 다시 길을 떠났다. 높은 곳으로 갈수록 초목들은 사라지고 어느새 진흙과 암석으로 바뀌었다.
일행 중 2명이 구토와 어지럼증 등 고소증 증상을 보이기 시작, 바위에 몸을 기대고 잠시 쉰 뒤 온힘을 다해 1만3,000피트의 다음 캠프지로 향했다.
7월11일 제3 캠프에 도착하니 햇빛에 반짝이는 만년설 봉이 시야에 들어왔다.그날 밤 캠프에 짐을 풀고 잠을 청한 우리는 두터운 재킷을 입지 않고는 잠을 도저히 잘 수 없을 정도로 추워서 몸을 떨었다.
다음날 서쪽 산등성이를 향해 우리는 또다시 가파른 산을 올랐다. 암벽을 꽉 움켜잡고 조금씩 정상을 향해 기어올라갔다.한참 기어오르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구름 위에 있었다, 발아래 구름이 솜이불처럼 깔린 장관이 펼쳐졌다. 1만5,500피트에 있는 제4 캠프까지는 길고 긴 등반이었다.
다음 목적지는 킬리만자로 아래쪽 정상인 마웬지봉이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일행은 저녁을 먹은 후 짐을 꾸려 서둘러 길을 떠났다. 우리가 묵던 모시 마을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불빛을 멀리 하고 길을 걷기 시작, 6시간쯤 걸려 4,000피트 가량 올라갔을 때 고소증이 느껴졌다. 눈 덮인 슬로프를 걸을 때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어지럼증이 엄습, 자칫하면 추락할 수 있는 위험 속에서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정상을 향해 지옥 같은 6시간 동안을 걷고 또 걸었다. 나는 킬리만자로 등반을 굳게 결심했을 때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지고 또 다졌다. ‘여기서 포기하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걸었다. 또 불확실한 모험을 위해 히말라야 정복에 나섰던 삼촌들 얼굴이 떠올랐다.
드디어 정상으로부터 수백 피트 아래인 지점에 도착했을 때 발아래 눈이 저벅 저벅 밟혔다. 하늘은 붉은 태양으로 빛이 났다. 마침내 ‘정상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표지판을 보고서야 그토록 고대하던 목적지에 도달했음을 느꼈다. 순간 나는 감격스런 순간을 앵글에 담기 위해 장갑을 벗어 던지고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킬리만자로 등반은 내 인생에 가장 값진 경험이었다. 내가 이룬 목표였기에..
■ 등반 일지
7월9일 해발 7,000피트 높이의 마카미 게이트에서 출발, 1만 피트 산등성이에 캠프 설치
7월10일 1만2,500피트에 캠프 설치
7월11일 1만3,000피트에 캠프 설치
7월12일 1만5,500피트에 캠프 설치
7월13일 오전 12시 정상 시도, 새벽 6시 정상 도착,
9,000피트에 설치된 캠프로 귀가.
7월14일 게이트로 귀가
<김진혜 기자> jhkim@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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