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독자들로부터 고발 아닌 고발 전화를 받을 때가 있다. 이런 내용이다.
“매일 한번씩 동네를 산보합니다. 운동 삼아 하는 것이지만 집집마다 깔끔하게 가꿔놓은 정원들을 구경하는 것도 큰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몇달 전부터 유난히 눈에 띄는 집이 있었습니다. 잔디를 깍지 않아 발목을 덮을 정도이고 잡초가 마구 자라 황폐한 느낌마저 듭니다. 집주인이 누군데 이런가 하고 속으로 흉을 봤는데 얼마 전에 보니까 한국사람이었습니다”
“이웃들이 보기에 코리안은 다 그런 줄 알 것 아닌가. 신문에서 계몽을 좀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말로 ‘고발’은 대개 끝을 맺는다.
정원 관리 못하는 집주인의 사정은 짐작이 간다. 부부가 억척스럽게 일해서 내 집 마련을 하기는 했지만 집 페이먼트 하느라 또 휴일 없이 일하다 보면 정원에 눈길 한번 못 주고 몇주가 지나가 버린 결과일 것이다.
“한국사람 사는 집은 얼른 보아도 눈에 띈다”는 가슴 아픈 지적을 맨 처음 한 사람은 도산 안창호였다. 1902년 10월 학업을 위해 미국에 온 도산은 마음 편하게 공부에만 전념할 수가 없었다. 한국사람들의 생활상이 말이 아니었다. 한국인들은 사는 집 안팎이 더럽고 불쾌한 냄새가 나고, 동족들끼리 큰 소리로 싸움질을 하는 것이 예사여서 미국인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었다.
“이러니 미국인들이 우리 민족을 미개인으로 본다”고 생각한 도산은 학업을 뒤로 미루고 민족운동을 시작했다. 민족운동의 도구는 빗자루였다. 동포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몸소 소제를 하고 커튼을 만들어 걸고 문 앞에 화분을 놓아 환경을 아름답게 가꾸었다.
그렇게 1년쯤 지나자 한국인들의 달라진 모습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한국인들에게 집을 빌려준 집주인이었다. 그는 도산의 공적에 감사하는 표시로 자기 가옥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집세를 매년 1개월분씩 감해주고 도산이 한국인들을 지도하는 데 사용할 장소를 무료로 제공했다. 최초로 한인회관이 생긴 것이었다.
100년이 지난 후 도산의 공적은 미주류사회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주의회가 LA한인타운 인근의 10번 프리웨이와 110번 프리웨이 교차지점을 ‘도산 안창호 헤리티지 인터체인지’로 명명했다.
미국의 프리웨이에 최초로 한인의 이름이 올라간다는 점에서 여간 자랑스런 일이 아니다. 반면 도산의 가르침이 아직도 우리에게 유효하다는 사실은 씁쓸하다. 도산은 “한국인의 상점에서는 안심하고 물건을 살수 있고, 한국인 노동자는 믿고 일을 맡길 수 있으며, 한국인의 언약이라면 믿을 수 있는” 날을 기다렸다. 도산 프리웨이를 지나다니면서 우리 모두 그 날을 앞당겼으면 한다.
<권정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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