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달 만에 아이가 태어나고 폐나 심장도 만들어지지 않은, 영 뜰 것 같지 않은 눈에, 손바닥만한 밀납인형같은 아이를 우린 평생 짊어질 한으로 키워야 하는 것에 너무도 무섭고 불안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첫 자식의 한 줄기 생명의 의지인 산소호흡기를 떼어 버렸다. 그리고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내리실 천벌에 더욱 무섭고 불안해했다.
임신의 기쁨을 주신 하느님은 어찌 에미도 되지 못한 내게 이리 힘든 선택과 시련을 주셨는지, 정말 나하고는 무관한 미지의 어느 남들에게나 있는 일로 나는 동정의 성금을 보내주면 되는 일이었던 뜻하지 않은 일들이 나에게도 일어나니, 그동안 나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이나 나만의 안위를 위한 행동이나 생각들을 부지런히 해내며 그로 인한 벌이었는지 잘못을 구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용서받은 죄인이랄지라도 시부모께는 용서받지 못할 며느리가 되어진 것에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수 있을 것란 생각으로 그나마 나 자신에게 위로를 할 뿐이었다.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분명히.
전라도 한 지역에 사는 사촌언니를 휴양을 겸해서 만나러 갔었다. 그 언니의 한 집 걸러 옆집에는 계란 도매 장수를 하는 부부가 있었다. 늘 그 부부는 계란판을 높이 쌓아들고 부지런히 왔다갔다를 한다. 그 집 앞을 지날 때는 닭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과 냄새가 지독하게 난다. 또한 그 가게 앞에는 목에 줄이 매인 고양이와 그 주위를 빈둥대는 파리들.
너 댓살은 되보이는 남아인지 여아인지 유모차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데 유모차 위에서 두 다리가 밑으로 한 참은 쳐져서 누워있는 아이가 있고 그 앞을 항상 작은 아이들이 서성대고 있었다.
그 아이의 엄마는 나하고 비슷한 나이였고 여섯 달 만에 아이를 낳았고 인큐베이터에서 중요 내장기관을 만들고 키웠고 그 후유증인 듯한 장애아가 되었고, 그 여자는 아이를 계란을 팔며 키워왔던 것이다.
나는 그 후로 그곳을 떠나왔다. 그 여자의 늘 수척한 얼굴을 더는 볼 수가 없었다. 나는 버렸던 자식을 있는 힘껏 껴안고 부비며 말로 못할 괴로움을 감내한 속에 햇빛에 눈부셔하며 찡그리는 아이의 얼굴위로 그 여자의 미소가 뿌려지고 그 집앞에 쌓여지는 빈 계란판의 개수보다 더 큰 행복이 나타날 것을 믿는다.
나는 세상에서 할 일이 많아졌음을 알았다. 그 후로 일년 뒤에,내게 하느님의 축복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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