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하나 있다. 중학과 고등학교 동창인 그녀는 이제는 살도 붙고 둥글둥글해져서 어디에 내 놓아도 먹성 좋고 입심 좋은 동네 아줌마 티를 내지만 스무 살 무렵에는 사십 킬로도 안 되는 몸무게 때문에 여러 사람의 보호 본능을 불러내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미모의 아가씨였다. 게다가 국적을 알 수 없는 큰 눈까지 가지고 있어 혹시라도 그 눈에 눈물이 그렁거리면 꼼짝없이 그 눈물의 사연에 붙들리곤 했다.
그 큰 눈에 담을 사연이 많았는지 어려서부터 우여곡절을 많이 겪은 그녀는 연락이 뜸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 한가지 사건을 만들어 오기 일쑤였는데 대개가 골치 아픈 일이었다. 그런 일이 생기면 동창들은 대책본부를 만들어 머리를 맞대고 이 궁리 저 궁리하기도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 일도 시들해져 버렸다. 대책본부의 레이더 망에 의하면 골치 아픈 숙제만 만들어 놓는 그녀가 행복할 때는 사라져 버린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기쁨을 나누지 않아서 더 이상의 고통도 나눌 수가 없다고 생각한 어린 날의 결단에 대해서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고통을 나누는 일과 기쁨을 나누는 일. 어느 쪽에 비중을 더 두느냐 하는 것에는 어폐가 있다. 그러나 사실 될 수만 있다면 찌푸린 얼굴보다는 환한 얼굴과 마주하고 싶고, 어둠의 자식보다는 태양의 자식과 인연을 맺는 것이 손익 계산에도 이윤이 남을 것임은 자명하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삶의 여정에서 나눈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자기 앞의 생 만해도 때로는 넘치고 버거워서 되도록 남의 일에는 관계하고 싶지 않고 또 참견 받고 싶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나 무엇이건 나누어지면 기쁨은 배가되고 고통은 줄어든다. 어렵긴 해도 기쁨을 나누기란 그리 복잡해 보이진 않는다. 말하는 편에서도 그렇고 억하심정이 없는 바에는 받아주는 편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고통을 나누기는 양측이 모두 괴로운 일이다. 말하는 편에서는 자존심이라는 터줏대감이 자리를 지키고 있고 듣는 편에서는 책임 같은 의무감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볼수록 고통을 나누는 일은 기쁨을 나누는 일보다 어렵다.기쁨은 진심이 있으면 나눌 수 있으나 어려움은 거기에 더해서 치마 끝을 들어 줄만큼이라도 내 것을 나누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것을 다른 이와 나누는 일은 참 하기 싫고 힘든 명제이다. 내 것은 온전히 두고 하는 나눔은 도처에 흔하다.
행복했을 때 사라져 버려 왕따의 위기에 처했던 친구는 지금은 세계화 시대에 걸 맞춰 이곳 저곳에서 생활의 둥지를 튼 동창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있다. 그리고 이제는 안정을 찾아 큰 눈에 눈물을 담지 않는다. 나는 기쁨을 나누지 않았던 그녀를 많이 섭섭해 했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 이해 할 여지가 생겼고 ,반면에 고통을 숨김없이 나누었던 그녀의 가난한 마음을 그리워했다. 그래서 서울 나들이 길에는 아무리 바빠도 그녀의 집에 들려 된장 찌개 한 그릇 얻어 먹으며 나의 근황보고를 마친다. 끈적하고 묵은 정은 된장 같이 텁텁하지만 아무리 먹어도 물리는 법이 없다. 어려운 시절을 같이 보냈던 이는 된장 맛을 생각나게 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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