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로비에 중년 여자들이 한무리 앉아 있는 거예요. ‘아니 이 시간에 웬 여자들이 저렇게 많이 모여 있을까’ 하며 그 옆을 지나려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겁니다. 돌아보니 그 나이든 아줌마들이 바로 내 동창들이었어요”
졸업후 근 30년만에 처음으로 여고 동창모임에 갔던 한 주부가 동창생들과의 첫 대면의 충격을 이렇게 말했다.
‘웬 늙은 여자들’의 두둑하고 처진 얼굴에서 열대여섯살의 상현이, 연심이, 순옥이, 귀원이…를 확인하면서 순식간에 세월 너머 그 시절의 새파란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동창들과의 재회는 보통 그렇게 시작된다.
동창모임의 달, 12월이 되었다. 각 학교별 송년회 안내가 신문 광고면을 연일 가득 채우고 있다. 초등학교, 중고교, 대학교 송년회에 참석하고, 스케줄 조정하며 아내나 남편의 송년회 따라다니다 보면 한달이 가고 새해가 되는 연말. 올해도 동창 송년회에 참석하는 것으로 한해를 마감해야 하나, 뭐 좀 색다른 송년의 방식은 없을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 동창회 모임에 가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의 이유를 들어보면 “매년 가봐야 그 행사가 그 행사이기 때문”이다.
“돌아가면서 하는 인사말도 지루하고, 2부는 으레 노래자랑인데 그것도 몇번 가보면 매번 똑같아요. 한시간 이상 진행되는 경품잔치도 당첨안된 사람들에게는 속만 상하는 낭비의 시간이지요”
50대, 60대들 중에는 “빚 독촉 당하는 듯한 기분이 싫다”는 사람들도 있다.
“후배들이 본인 의사도 묻지 않고 이사를 시켜놓고는 연말모임에 가면 자리에 앉자마자 이사회비 내라고 재촉합니다. 게다가 한쪽에서는 경품 티켓 사라고 들이밀지요, 내가 돈 내는 기계인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 불만, 그런 언짢음에도 불구하고, 대개는 또 여전히 동창모임으로 발길을 향하는 데 그것은 동창회만이 갖는 특별한 매력 때문이라고 본다. 성장기를 같이 보낸, 같은 콩깍지 안의 콩 같은 근원적 친밀감과 소속감, 그로부터 형성되는 정체성이다.
한 정신과 의사는 말한다.
“미국 문화는 개인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반면 동양 문화는 집단의 정체성을 중요시합니다. 나 개인보다는 어느 집단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나를 나 되게 만든다고 생각하고 거기서 힘을 얻지요. 동창회는 그런 정체성을 확인하는 기회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민 와서 전공과는 거리가 먼 일을 생업으로 할수록 동창회에 열심인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아울러 여성들이 40대 중반을 넘어서며 갑자기 동창회에 재미를 붙이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남편은 바쁘고, 자녀들은 더 이상 엄마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고, 심신은 갱년기로 접어들어 찌뿌드드 해지는 시기, 아내와 엄마로만 20년쯤 살다보니 내가 본래 누구였는지가 가물가물해지는 시기이다.
그때 여성들은 동창회를 찾는데, 가서 군살 붙고 잔주름 생긴 동창들을 보는 순간 잃었던 정체성을 회복하는 느낌들을 갖는다. 나의 여고 동창중 한명은 이런 표현을 썼다.
“들판에 혼자 떠돌던 짐승이 자기 무리를 만난 느낌이야. 안심이 되고 편안한 느낌, 나를 되찾은 느낌이지”
너무 편해서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들, 부끄러울 수도 있는 이야기들을 저마다 털어놓는데, 같은 나이로 같은 시대를 살아서인지, 10여년, 20여년 만에 만났어도 구구절절 사연들이 쏙쏙 다 받아들여지는 것이 동창모임의 맛이라고 그는 말했다. “눈이 침침하다. 허리가 쑤신다”등 몸의 증상들은 누가 한마디만 하면 두 말이 필요없이 다 알아듣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편함이다.
중년은 계절로 치면 가을이다. 동창들은 가을을 맞은 나에게 봄철의 싱싱했던 내 모습을 상기시켜주는 존재들이다. 현실의 가을·겨울을 밀쳐두고 잠시 봄의 생기에 취하고 싶다면, 연말에 가장 손쉬운 것은 동창회이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