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만달러짜리가 아니라 ‘제2의 이스마엘 발데스’구만"
17일 샌디에고 파드레스전에서 7회초 구원투수로 등판한 박찬호(LA 다저스)가 아웃카운트 1개도 잡지 못한 채 안타 2개와 포볼 3개를 내주고 팬들의 야유가운데 마운드를 내려가자 프레스박스의 어떤 미국인 기자가 한 말이다. "메이저리그 첫 2,000만달러 투수라는 이야기가 등장한 지가 불과 얼마전인데 결국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선수냐"는 탄식도 곁들였다.
발데스는 지난 1994년부터 99년까지와 지난해 후반 다저스에서 뛰었고 현재는 애나하임 에인절스 소속인 우완투수. 박찬호와 동갑으로 박보다 1년 빨리 다저스의 풀타임 선발 로테이션에 진입한 발데스는 지난 95년부터 98년까지 4년연속 두자리수 승리를 따내며 팀의 차세대 에이스로 각광받았으나 결국 확실히 보장된 듯한 스타덤에 오르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 고비에서 몸을 사리는 투지부족과 팀보다 개인성적을 앞세우는 듯한 이기적 자세로 인해 팬들과 동료선수들의 신뢰를 잃은 것이 가장 큰 이유. 그가 특급투수로 성장하길 기다리던 다저스는 끝내 기다리다 지쳐 그를 포기했고 발데스는 장래가 확실한 특급유망주에서 떠돌이 선수로 밀려났다.
그럼 이 기자는 왜 박찬호를 발데스와 비교했을까. 바로 이날 박찬호에게서 이를 악물고 위기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투지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찬호가 첫 5타자를 모두 출루시킨 뒤에도 다저스 벤치는 그를 교체할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박찬호는 투구도중 미끄러져 왼쪽 아킬레스건에 통증이 왔다며 거의 스스로 마운드를 내려왔다. 그는 이 상황에서 투지 없던 발데스와 유사한 모습을 본 것이었다.
물론 박찬호에게 이유는 있었다. 우선 컨디션이 100%가 아니었고 경미하나마 부상도 입었다. 무리할 경우 3일 뒤(20일)에 예정된 선발등판에 문제가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이날 구원등판은 그가 자청한 것이었다. 부담 없는 상황에서 1이닝정도 던져 투구감각을 다듬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실제 그가 투입된 상황은 1대1 동점인 7회초로 승부의 최대 고비였고 투구감각을 다듬을 여유는 전혀 없었다. 전력투구가 요구됐다. 그런 상황에서 한때 에이스 역할을 했던 그가 5명을 상대로 아웃 하나 잡지 못한 채 3일 뒤에 올 선발등판을 고려, 무리하지 않기 위해 마운드를 내려간 것은 팀 동료나 팬들에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설사 선발등판을 미루는 한이 있어도 이날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것이 시즌의 최대고비에 처한 팀의 리더로서 올바른 자세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 것은 당연했다. 지금 다저스는 무조건 1승이 절실한 입장. 총력전에 들어간 상황에서 며칠 뒤의 등판을 고려, 무리하지 않았다는 설명이 먹혀들 리가 없다. 팀보다 개인을 앞세운다고 비난받을 위험만 커졌다.
박찬호는 일단 예정대로 20일 오후 7시 다저스테디엄에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를 상대로 등판할 것으로 보인다. 또 다시 벼랑 끝에 선 출격. 박찬호는 이미 올해 두 차례 절대적 위기상황에서 모두 완투승을 따내는 끈질긴 생명력과 근성을 보였다. 연속 5차례 등판에서 승리에 실패했던 지난 7월18일에는 밀워키 브루어스를 2안타로 셧아웃시켰고 감독과 동료선수로부터 혹독한 비난을 받은 뒤인 지난달 24일에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5안타 1실점 완투승을 거둬 화려하게 부활했다. 과연 이번에도 특유의 근성을 발휘해 점차 높아지고 있는 비난과 우려의 목소리를 잠재우는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줄 수 있을 지 팬들은 걱정스럽게 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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