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주 좋아하는 시인인 김용택 시인의 시집 속에서 ‘그 여자네 집’이라는 시를 읽었다. 읽는 도중 공연히 눈물이 핑 돌면서 명치끝이 저려 오는게 마치 그 시의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등장하는 그 여자의 토라짐이 나의 것 같기도 했고 남자 주인공은 흠모했던 동네오빠 같기도 한 것이, 나를 예전의 기억 속으로 데려가 주었다.
사십대의 중반도 훌쩍 넘긴 내게 그런 속마음이 살아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는데 의외였다. 내가 어릴 적엔 우리 어머니 또래의 사람들은 세상을 다 산 사람들로만 생각했었다. 감정도 없고 사는 재미도 없는 무덤덤한 사람들로만 여겼었다. 나이먹은 선생님이나 부모님을 ‘노털’이니 ‘꼰대’니 하며 사람 축에도 안 끼워 넣었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아이 또래의 젊은이들도 나를 그렇고 그런 구닥다리로 여기고 있는게 아닌가 철렁했다. 나는 아직도 ‘사랑’이라는 단어에 가슴 설레는 특별한 중년이 아니던가?
발렌타인 날을 앞두고 신문, 잡지의 광고는 몽땅 붉은 색 하트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연인들의 마음을 부추겨 매상을 올리고픈 상혼의 결과이겠다. 내가 젊었을 적 한국에서도 발렌타인 날을 기념하는 이들이 혹간 있긴 했다. 그땐 여자가 남자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전해도 되는 합법적인(?)날 이라고 알려져서 용기를 내어 살짝 선물을 한다고 들었었다.
요즈음엔 그 범위가 주변의 사람 모두라니 참으로 부담되는 사랑 전하기가 아닌가 한다. 낭만과는 거리가 먼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 감흥 없이 지나쳐 왔었다. 그러니 흔한 붉은 장미 한송이, 초컬릿 하나, 하트가 그려진 속옷 한장 안 주고 받아도 섭섭함 없이 바가지도 긁어보지도 않고 살아 온 셈이다. 지금은 입맛도 감정도 더욱 무디어졌다. 한조각 먹으면 갈증을 유발시키는 미제 초컬릿의 지나친 달콤함도 입에 안맞을 뿐더러, 그날을 기해 피크로 비싼 장미보단 오래가는 국화화분이 더 좋고, 하트가 그려진 속옷을 쑥스럽게 입는 것 보단 그에 상당하는 현찰을 더 선호하는 아줌마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되어버렸다.
그런 내겐 신문의 비싼 지면을 사서 ‘당신만을 사랑해’ 하고 광고를 내는 이들이 푼수 내지는 반푼으로 보일 수밖에. 드러내어 놓고 하는 요즘 사람들의 노골적인 사랑표현을 보고 닭살 스럽다고 느낀 지 오래 되었다. 연인사이의 또는 부부간의 사랑은 은밀한 것이며 둘만의 것이 아닌가. 동네방네 떠드는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지 않을까 생각해왔다. 더군다나 젊은이들 사이에선 무슨 선물이 오갔는가가 사랑의 척도가 되어 버렸다.
사랑은 셀룰러 폰도 아니고 다이아몬드 반지가 아니다. 향수도 아니고 드레스도 아니다. 사랑은 눈에 안 보이는 고귀한 감정인 것이다. 호감을 갖고있는 사람끼리의 선물교환은 쉬울 수 있다. 상식적이며 당연한 것이다. 귀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다. 사이가 틀어져 마음상해 있는 사람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면 사랑의 의미는 더 할 것이며 더 나아가 내가 모르는 이라도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을 때 사랑의 힘은 더 발휘될 것이다.
사이버 시대에 컴퓨터를 끼고 사는 내 아이가 이런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 남에게 보이는 사랑, 들키고 싶은 가벼운 사랑이 아닌, 한 차원 높인 은밀하고도 이타적인 사랑. 힘없고 병들고 가난한자를 더욱 사랑한 사랑의 화신인 예수를 닮은 사랑을 하는 청년으로 자라길 바란다. 낭만에 초를 치는 소리라고 기분 상해할 젊은이들이 많겠지만 어쩌겠는가 나이 먹으면 심술도 많아지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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