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영국의 상징이 엘리자베스 여왕이라면 윈스턴 처칠 수상은 근대 영국의 상징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정도로 영국 역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중절모에 씨가를 문 모습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사실 처칠 수상에 대해서는 알려진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2차 대전 당시 총리 취임식에서 “피와 노력과 땀과 눈물 밖에는 줄 것이 없다” 라는 유명한 연설은 위기에 처해 희망을 잃은 국민들을 단합시켰다. 이 이야기는 한국 교과서에도 실려 있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처칠 수상에 대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놀랄 일은 아니지만 그의 어머니는 영국인이 아니고 미국인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Brooklyn 출신의 New Yorker였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 1870년대 통합된 미국은 급격한 경제 발전을 이룬다. 이 시기를 Gilded Age라고 하는데 이 시기에 뉴욕을 중심으로 수많은 신흥 부호 기업가들이 탄생하게 된다. 지금까지도 잘 알려진 Carnegie와 Rockefeller도 J.P. Morgan 같은 tycoon 들도 이 시기가 시작이었다.
이즈음에 뉴욕에는 “400 Society”라는 기득권층들의 모임인 사교 클럽이 있었다. 이 모임은 “Old money”라고 불리우는 세습 부자들이 주 회원이었는데 한마디로 이너 써클이었다. 하이 쏘싸이터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모임은 폐쇄적으로 당대에 부자가 된 한마디로 “New rich 또는 New money“라고 불리우던 졸부(?)들에게 입회가 허용되지 않았다.
미국 내에서의 신분 상승이 쉽지 않다고 판단한 New rich 들에게 유럽의 사교계는 돌파구였다.
유럽 사회에서 이들 미국 신흥부자들의 딸들을 “Dollar princess”라고 불렀다. 그 시기의 유럽의 귀족들은 생활이 궁핍한 경우가 많았다. 말이 귀족이지 품위 유지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때 신분 상승이 필요한 미국 신흥부자들의 욕구와 서로 맞아 떨어지는 것이 있었다.
한쪽은 미국 신흥 부호의 돈과 한쪽은 귀족이 되는 신분 상승의 절묘한 교환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454명의 Dollar princess가 유럽의 귀족과 결혼했다고 한다.
처칠 수상의 외할아버지 Leonard Jerome은 뉴욕주 씨라큐스 가까운 작은 도시의 중산층 출신으로 자수성가하여 “king of Wall street”라고 불리울 정도로 주식으로 대부호가 되었다.
그 역시 다른 New rich들처럼 딸 Jennie Jerome을 Paris의 사교계로 진출시켰다. 그녀는 그곳에서 영국의 Churchill 공작의 셋째 아들이며 유망 청년정치인 Lord Randolph Churchill과 만나 결혼하면서 영국의 귀족이 되어 아버지 Leonard Jerome이 원하던 신분 상승을 이루었다.
그녀는 슬하에 두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아들 Winston이 바로 영국 역사의 한 획을 그은 Winston Churchill 수상이었다. 역사는 만약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이 어찌보면 정략적이었던 국제결혼이 없었다면 영국 역사는 어떤 식으로 흘러갔을까? 별 의미없는 의문일 수 있지만 역사는 필연보다 우연에 더 크게 영향을 받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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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향민/영어음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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