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누비던 뱃사람들의 고향, 메사추세츠 주 뉴 베드퍼드. 딸이 시집가면 작은 고래를 선물했다는 말이 전해질 만큼, 이곳은 고래로 부를 축적한 도시였다. 한때 500척의 포경선이 운항하며 세상을 밝히는 고래기름을 공급했다. 포경선을 타기 위해 선원들이 모여들던 거리는 이제 관광객의 발걸음으로 채워져 있다. 그 길 끝에 아담한 건물, ‘선원의 교회(Whaleman’s Chapel)’가 있다. 기둥에는 “고래잡이 선원들은 출항 전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다”라는 문구가 남아 있다. 무사 귀환을 알 수 없는 항해 앞에서, 그들은 이 예배당에서 잠시나마 안정을 얻었을 것이다.
교회 안으로 들어서니 벽면을 따라 바다에서 죽거나 실종된 이들의 비문이 걸려 있었다. 그저 이름만 남은 비문 앞에 멈춰 서니 묵직한 침묵이 감돌았다. 혹시 소설에 등장하는 이름이 섞여 있을까 눈길을 옮겨 보았다. 맨 뒤 구석에는 ‘허만 멜빌이 앉았던 자리’라는 작은 명패가 붙어 있었다. 나무 의자는 차갑고 딱딱했지만, 그가 앉아 고개를 숙였을 장면을 떠올리자 낯선 전율이 일었다.
설교단은 뱃머리 모양이었다. 멜빌이 ≪모비 딕≫에 묘사한 대로 꾸며놓았다고 했다. 나는 낡고 거칠 것이라 상상했지만, 실제로는 깨끗하고 단정했다. 예배당으로서 여전히 제 기능을 다하기 때문이리라. 멜빌은 이 자리에서 어떤 기도를 했을까. 그는 18세부터 배를 탔고, 상선과 포경선을 거쳐 남태평양까지 항해하다 식인 부족에게 붙잡히는 등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다. 바다에서 건져 올린 그의 삶은 이미 소설의 원형이었는지도 모른다.
포경은 끈기와 집념의 싸움이었다. 끝없는 기다림 끝에 고래가 나타나면 여섯 명이 작은 배를 타고 작살을 던졌다. 성공하면 일확천금, 실패하면 빈손으로 귀향해야 했다. 멜빌은 ‘에섹스 호의 비극’에 더욱 자극받았다. 거대한 향고래의 역공으로 배가 부서지고, 200일漂流 끝에 다섯 명만 살아남은 사건이었다. 그는 이를 토대로 자신의 체험을 더해 ‘모비 딕’을 썼다.
소설은 ‘나는 이스마엘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성경 속 아브라함의 사생아 이름을 붙인 화자는 끝내 살아남아 비극을 전한다. 선장 에이허브는 다리를 잃고도 광기에 사로잡혀 복수를 좇는다. 금화를 내걸며 선원들을 선동하지만, 스타벅은 이에 맞서고, 스텁과 플래스크, 퀴퀘그 등 개성 강한 인물들이 이야기를 채운다. 결국 피쿼드 호는 3일간의 사투 끝에 침몰하고, 인간과 바다, 문명과 자연의 충돌은 독자에게 무거운 질문을 남긴다.
멜빌의 작품은 에드거 앨런 포우의 ≪아서 고든 핌 이야기≫처럼 바다 위의 비극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고래는 단지 자연의 일부였으나, 인간은 그것을 정복하려다 오만에 빠졌다. 매플 신부의 경고처럼 바다에 도전한 자는 결국 영혼을 잃게 되는 것이다.
멜빌은 이 소설을 친구 호손에게 헌정했으나, 대중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여행작가로 치부당한 그는 절필하고 세관 검사원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모비 딕이었다. 바다의 설산처럼 문학사의 파도 위에 서서 물보라를 일으킨 존재였다.
피쿼드 호는 침몰했지만, 나는 지금 그 배에 타고 있는 듯하다. 이곳에 오기 전 어렵게 완독한 ≪모비 딕≫의 마지막 장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선원의 교회’ 안에는 바닷바람을 닮은 비릿한 냄새가 감돌았다. 멜빌의 명패에 내려앉은 먼지를 손끝으로 털어내며, 바다 건너 그에게 그리고 이 길 끝까지 나를 이끈 내 마음에도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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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숙 수필문학가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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