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영화 ‘터미네이터 2’의 유명한 모터사이클 추격 장면은 메마른 콘크리트 수로 위를 달리는 로스앤젤레스강(LA River)을 배경으로 삼는다. 흘러야 할 물길이 사라진 채 도시의 뒷골목처럼 봉인된 이 수로는 어느새 액션 영화의 무대가 되었다. 하지만 강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도시는 강을 통해 기억과 삶을 잇기도, 지우기도 한다.
서울의 청계천도 비슷한 궤적을 겪었다. 조선시대부터 서민의 삶과 시장을 관통하던 이 하천은 산업화 과정에서 콘크리트로 덮이고 고가도로로 덮여 ‘속도의 시대’를 찬미하는 도시 인프라의 일부가 되었다. 2003년 복원 사업은 2년 반 만에 인공 수로를 되살렸고, 서울은 ‘환경도시’ 이미지를 얻었다. 다리 이름을 기억하고 물길을 따라 걷는 풍경이 회복된 듯했지만, 무엇이 진짜로 복원되었는지는 의문이다.
물은 돌아왔지만, 그 물길에 스며 있던 노동의 기억-전태일과 평화시장의 삶-은 복원 사업에서 후순위로 밀렸다. 인근 상인들과 노점상들은 임대료 상승으로 외곽으로 밀려났고, 보행로는 관광객과 미학적 연출을 우선하다 보니 시민들의 이용에 충분하지 못했다. 또한 자전거 도로가 없어 자전거를 타고 청계천변을 달릴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청계천은 ‘기억의 강’이라기보다 ‘이미지의 강’으로 되었다.
LA 강의 흐름은 다르다. 1930년대 대홍수 이후 전 구간이 콘크리트화되어 잊혔던 이 강은 21세기 들어 라틴계 이민자, 지역 커뮤니티와 예술가, 환경운동가들의 손길로 서서히 되살아나고 있다. 복원은 느리고 누적적이다. 공청회와 예술제, 공동체 정원 조성 등으로 ‘관계의 장소’로 재구성되며, 완전한 복원 목표는 2050년으로 잡혀 있다.
또한 2026년 월드컵과 2028년 올림픽을 대비해 5.5마일 길이의 보행·자전거 도로를 개통하지만 복원의 속도는 느리다. 느린 속도는 신뢰를 쌓는 과정이 되고 있다.
스페인의 마드리드 리오 프로젝트는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도시의 고속도로를 지하로 숨기고 그 위를 공원으로 되살린 이 사업은 기술을 땅속으로 옮기고, 지상에는 놀이·문화·생태를 공존시키는 방식으로 과거의 자동차 중심 문화를 반성과 상상으로 전환시켰다. 외국에서 견학 온 기술자와 공무원들은 “지하차도가 굉장히 길다”는 감탄만 할 뿐 지상에 생태공원과 문화 공간이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는 안내원의 설명이 이어진다. 기술과 생태, 기억과 상상이 충돌하지 않고 어우러진 복원이었다.
이들 세 사례는 서로 다른 언어로 ‘내일의 도시’를 말한다. 청계천은 미래를 ‘디자인’했고, LA 강은 기억을 바탕으로 ‘공존’을 꿈꾸며, 마드리드 리오는 기술과 상상의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공통된 질문이 남는다. 복원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시민 없는 복원은 또 다른 젠트리피케이션일 뿐이다. 진정한 복원은 물을 흐르게 하는 것을 넘어서, 그 물가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과 삶이 함께 흐르도록 하는 것이다. 속도를 좇을 것인가, 기억을 따를 것인가. 미래를 진정으로 흐르게 하고 싶다면 우리는 먼저 사람과 기억이 흐르던 강의 자갈 위를 다시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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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성 21세기 글로벌 도시전략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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