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메이커(Pacemaker)는 마라톤·사이클 등 장거리 경기에서 경기 속도(Pace)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 선수를 지칭한다. 초기에는 세계기록 경신에 나선 선수를 돕는 전략적 역할이 주였다. 영국 육상선수 로저 배니스터가 1954년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온 ‘1마일(약 1,609m) 4분’ 벽을 세계 최초로 깬 데는 페이스메이커 2명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800m가 주 종목인 선수 2명이 전속력으로 이어 달려 배니스터의 페이스를 끌어줬다.
■ 페이스메이커는 1970년대 들어 보편화됐다. 기록 단축이나 우승을 원하는 팀의 경기 운영 핵심 전략이 됐다. 경기 초반 의도적으로 빨리 달리는 오버페이스로 경쟁 선수의 페이스를 흐트러뜨리는 등 변칙 전술이 추가됐다. 페이스메이커는 완주가 목표가 아니다 보니 42.195㎞ 구간 중 30㎞ 지점까지 선두에서 달리다 이후 중도 이탈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스포츠 정신을 해친다는 지적이 없지 않았지만 요즘은 필수 요소로 여겨진다.
■ 조연인 페이스메이커가 주연으로 등극한 경우도 있다. 5,000m·1,000m 중장거리를 뛰던 황영조 선수는 1991년 페이스메이커로 처음 출전한 마라톤에서 3위로 입상하면서 전향했고, 1년 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땄다. 2003년 베를린 마라톤에서는 케냐의 페이스메이커 새미 코리르가 2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2시간4분55초로 세계 신기록을 달성하며 1위를 한 팀 동료 폴 터갓에 1초 뒤졌다. 페이스메이커가 신기록 달성을 견인하는 역할을 넘어 우승 경쟁을 한 사례다.
■ 이재명 대통령이 첫 한미 정상회담에서 페이스메이커를 자임했다. 북한 핵·미사일 문제 해결이라는 ‘마라톤’을 완주하기 위해 도널트 트럼프 대통령에게 주역 자리를 건네고 한국은 조력자가 되겠다는 뜻이다.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운전자론’과는 다른 접근 방식이다. 트럼프 1기 당시 남북이 초반 오버페이스한 탓에 북미 대화가 결승점까지 다다르지 못했다는 평가가 감안된 변화라는 분석이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마라톤 완주에 도전하는 남북미가 이번에는 결승선까지 통과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이동현 / 한국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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