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종욱 전 볼티모어대 교수 사회학박사, MD
지난 25일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북한의 남침으로 일어난 한국 6.25전쟁이 75주년을 맞는 날이다.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이 전쟁을 맞았다. 당시 13살의 소년이었던 내가 75년의 세월이 흘러 곧 90살을 코앞에 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내가 겪었던 6.25전쟁을 회상해 본다.
전쟁 돌발 다음 날 월요일, 내가 다니던 선린상업중학교에 등교했을 때 학교 당국은 학생들을 운동장에 모이게 해서 지금 국가에 큰 불상사가 일어났으니 집으로 돌아가서 소식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그 후 학교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서울 영등포구 한강변 흑석동에서 살고있던 나는 이틀 후 한강 대교가 두동강이가 난 현실을 목격했다. 그리고 많은 시민들이 대교 옆에 설치된 부교를 통해 강을 건너고 있었다.
남침 3일만인 6월 28일 서울은 북한군 점령지가 되고 말았다. 다음 날 흑석동 신작로에 인민군 탱크가 지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탱크행렬을 지켜보면서 인민군이 남침한 사실을 알게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지 한 달 후 동사무실에는 인민위원회와 민청(조선민주청년동맹) 간판이 붙었다. 하루는 가깝게 지내던 이웃 아저씨가 나와 친구들에게 찾아와 목요일 저녁 민청모임에 오라고 했다. 우리는 그 모임에서 인민위원회 간부들이 가르치는 김일성 원수의 이야기와 북한 국가를 비롯한 여러 북한의 애국 노래를 배웠다.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은 후퇴하고 9월 28일 수도회복이 이루어졌다. 나는 한강 변에 흩어져 있는 인민군, 국군의 시체들을 보면서 전쟁의 비참을 몸소 체험했다. 우리는 먹을 것이 없어 들에 나는 먹을 수 있는 풀은 모두 뜯어다가 먹었다. 그리고 또 다른 삼개월이 흘러 혹독한 겨울이 다가왔다. 10월 10일 평양을 탈환하고 압록강 부근까지 전진했던 유엔군이 중공군의 전쟁 개입으로 1951년 1월 4일 이른바 1.4후퇴를 시작했다. 6.25때 피난을 못했던 우리 가족은 동네사람들과 함께 피난 길에 들어섰다. 신작로는 피난민으로 길을 메웠다. 우리는 발목이 훨씬 넘은 눈길을 혜치고 밤낮으로 걸어 삼일만에 경기도 용인을 지나 광주 삼거리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우리를 포함해서 수백명의 피난민들이 이 동네에서 묵고 있었다. 먹을 것이 전혀 없었다. 며칠후 중공군이 이 마을을 일주일쯤 주둔하다가 남쪽으로 내려갔다.
나는 우리 가족을 남겨두고 의종이라는 친구와 함께 식량을 구하려고 정부미 창고 마을로 식량을 구하려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내 친구와 나는 가족을 잃었다.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한 10일쯤 있다가 북진해서 오는 미군 기갑부대를 만났다. 나는 이 기갑부대의 이른바 ‘하우스 보이'가 되어 미군들과 함께 서울쪽으로 오던 중 흩어졌던 가족을 만나 마침내 흑석동 살던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952년 3월 15일 서울을 탈환한 유엔군은 북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1.4후퇴 피난에서 돌아 온 우리 가족은 살아 갈 길이 막막했다. 흑석동 중앙대학 교정에 미군부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몇몇 친구들과 함께 널판지로 구두닦기통을 만들었다. 그리고 매일 아침 미군부대 앞에 가서 미군들의 구두를 닦아주었다. 미군들은 대가로 돈대신 초코렛트 껌 빵 과자 통조림등을 주었다. 우리 가족은 이것들과 꿀꿀이 죽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꿀꿀이 죽은 미군들이 먹고 남은 음식을 수거해서 만든 음식인데 ‘양키시장'에서 팔고 있었다. 당시 이 시장에서는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물건들이 거래되고 있었는데 나는 가끔 구두닦기로 받은 물건들을 이 시장에 가서 팔았다.
1952년 늦봄 영등포 대방동에 피난중학교인 영등포훈육소가 문을 열고 학교 교육을 시작했다. 이 학교에는 피난갔다 돌아 온 여러 중학교 학생들이 모였다. 이 때 학제가 바뀌어 5년제 중학교가 중학 3년, 고등학교 3년제가 되어 나는 첫 고등학교 제도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당시 학교에서는 군사훈련을 받는 교련시간이 일주일에 두번 있었다. 그리고 학생들은 수시로 시내로 나가 휴전반대 시위를 했다. 1952년 3월부터 개성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통일없는 휴전을 반대했다.
그러나 1953년 7월 27일 한국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엔군과 북한, 중공군이 휴전협정에 동의하여 발효하게 되었다. 이로써 6.25전쟁은 종전이 아니라 휴전으로 막을 내렸다.
대한민국은 같은 민족끼리 싸운 6.25전쟁을 통해 어느 다른 전쟁보다 더 많은 인명 및 자산 피해를 입었다. 남북한 인명피해가 3백만에 이른다. 남한이 약 2백만, 북한이 약 1백만이 생명을 잃었다. 이는 3천만 전체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되며 모든 산업시설이 완전히 파괴되어 복구하는데 10여년이 걸렸다. 1950년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받아 한반도 공산통일화를 목적으로 남침, 6.25전쟁을 일으킨 김일성 북한정권은 미국이 주도한 유엔군의 반격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더구나 이승만대통령이 이끈 투철한 반공정신과 외교력은 정전 후 남한을 자유주의 민주국가의 국가 기초를 닦는데 큰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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