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에 잠이 깨어 생각과 생각 사이에서 서성거리다 보니 어둠이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창에 드리워진 블라인드 사이로 하얗게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음을 확인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창 밖으로는 눈이 오는데 창과 나란히 서 있는 자작나무 아래에 어미 사슴이 머리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사슴의 등 위에도 눈이 내리는데, 녀석은 눈 밭에 발목이 빠진 줄도 모르고 미동도 없이 그렇게 오롯이 한폭의 풍경이 되었다. 이 겨울에 눈이라도 없었다면 얼마나 단조롭고 건조했을까?
서둘러 사진기를 찾아 들고 창가로 다가 갔으나 셔터를 누르지 않은 것은 이 풍경을 마음 안에 담아두는 것이 어설픈 사진 한장보다 또렷이 기억되리라 생각 되었기 때문이다.
작은 풍경이 모여 하나의 풍경이 완성된다고 했던 어느 시인의 말이 기억난다. 오래전에 백석이 흰 당나귀를 타고 가고 싶다 했던 산골의 풍경이 지나가는 밤이다.
낡은 달력을 떼어 낸 자리에 새 달력을 걸었다. 내가 이미 묵묵히 살아 낸 새 해의 며칠이, 또 올 한 해 열심히 걸어야 할 하루 하루가 선명한 숫자로 쓰여 있다. 지난 한 달을 되돌아 보니 특별히 기억될 만한 사건이 없다.
그나마 떠오르는 대로 일상 밖의 일을 적어보았다. 큰 아이 생일이라 맨해튼으로 나가 가족들이 함께 저녁을 먹은 주말의 하루가 있었고, 둘째 아이를 만나러 아이가 살고 있는 도시에 다녀왔던 하루, 아내가 미장원에 간다고 해서 함께 따라 나섰다가 덩달아 머리를 깎고 온 하루, 휴가를 떠나기 전에 목적지의 역사와 볼 곳 등을 검색해본 저녁.
그리고 틈틈이 김훈의 책을 읽었던 새벽, 그리고… 낡은 수레바퀴처럼 숨가쁘게 돌아가는 참 보잘것 없는 소시민의 삶이지만 오히려 특별하지않은 이 평범한 일상에 안도한다.
물론 조금 더 많은 세상을 보겠다는 욕심 때문에 놓쳐버린 풍경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능선을 넘어 노을을 가져오는 새일 수도 있고, 아직 새벽빛이 보이기 전에 언 손으로 눈을 치우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또한 아무런 생각도 없이 추운 발걸음을 옮겨 놓는 청년일 수도, 어제와 똑같은 시간에 문을 여는 피자집 노인일 수도, 푸드카트에 겨우 사과 한 봉지를 담고 넓은 파킹장을 가로지르는 할머니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사람이 사는 풍경은 처음부터 대단한 것이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사는게 힘들고 바쁘다고 해도 사람은 결국 사계절을 품고 사는 존재여서 계절의 끝과 시작 사이에서 절절히 뉘우치고 의연히 결심을 하기도 한다.
또한 시각은 아침과 저녁으로 나뉘어 질뿐 길을 걸을 때마다 생각은 바뀌고 그 생각이 계절을 만날 즈음, 우리는 인생이라는 나이테를 더하는 것이다.
인생은 단조롭고 때로는 무료하지만 길은 길을 만나고, 그 길은 또 다른 길로 나누어 지는 것이다. 사람의 주소는 집이 아니라 길이라 했으니 오늘 걸어 가는 길 어딘가에 새겨질 주소가 궁금해 진다.
서재를 정리하던 중에 발견한 박경리 선생의 오래된 책에서 ‘버리고 갈 것 만 남아서 참 홀가분 하다.’ 라는 구절을 읽었다. 밑줄까지 그어져 있는걸 보니 그 전에도 이 책을 읽으며 그 구절에 머물렀었나 보다. 소유하지 않고 살아서 뒷정리를 할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가르침일 것이다.
산다는 것은 결국 자기 안에 있는 깊은 우물을 맑게 채우고 또 길어내는 여정일 것이다. 다시 신발끈을 고쳐 매고 길을 나서 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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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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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같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