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전 이사회 “정부 뜻 따르면 배임죄” 공포, 이례적 반기… 공직사회에‘복지부동’확산
▶ “정권 교체시 문책대비 상관 지시 녹취·메모”
지난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한전 아트센터에서 한국전력 이사들이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안을 다룰 한국전력 이사회’가 개의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연합>
문재인정부가 강력히 추진해온 ‘적폐 청산’의 역풍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표적 공기업인 한국전력공사 이사회가 지난 21일 이례적으로 정부의 여름철 누진제 완화안을 보류하며 반기를 든 것은 적폐 청산 학습효과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정부 지침을 따르면 한전의 손실이 증가해 배임죄 혐의를 받을 수 있다는 공포 때문에 일단 정부안에 제동을 건 것이다. 공직 사회 전반이 불안·불만·불신의 ‘3불 현상’에 빠져 얼어붙은 것도 과도한 적폐 청산 몰이의 후유증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과거에는 정부 지침을 그대로 수행했던 한전 이사회가 정부의 여름철 전기료 인하 방안에 제동을 건 배경에는 ‘한전의 손실 증가에 대해 정부가 제도적 보완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이사들의 공감대가 작용한 데 따른 것이다.
정부의 누진제 완화 개편안과 관련, 한국전력의 한 사외이사는 “정부가 한전의 손실 보전을 확실히 함으로써 이사들의 배임 가능성을 낮춰야 의결이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익명을 요구한 A 사외이사는 23일 언론 인터뷰에서 한전 이사회가 당초 예상과 달리 정부의 누진제 개편안을 전기요금 약관에 반영하는 것을 전격 보류한 것에 대해 “공은 이제 정부에 넘어갔다“며 이같이 말했다. 한전 이사회는 김종갑 사장 등 사내이사 7명과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 등 사이외사 8명으로 이뤄졌으며 김 교수가 의장을 맡고 있다.
한전은 이에 앞서 대형 로펌 2곳에 누진제 개편안을 수용하면 일부 소액주주들의 주장처럼 배임에 해당하는지를 자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배임 부분은 한전이 올 1분기 6,000억원 넘는 사상 최대 분기별 적자를 냈는데도 누진제 완화에 따른 부담을 연간 최대 3,000억원가량 떠안아야 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다. 정부안대로 7, 8월 1,600만 가구의 전기 요금을 월 평균 1만원가량 할인하는 내용의 ‘누진 구간 확대 개편’을 추진할 경우 3천억원 이상의 비용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누진제 개편 추진과 관련해 일각에서는 ‘로펌이 배임으로 결론낸 것으로 알려졌다’는 관측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산업부는 아직 누진제 개편에 따른 한전 손실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배임 문제를 논하기는 너무 이르다고 주장했다. 한전은 이르면 금주 중 임시이사회를 열고 누진제 개편안 문제를 다시 논의할 것으로 전망돼 귀추가 주목된다. 정치권 관계자는 “현정부의 적폐 청산 작업과 재판 과정에서 직권남용과 배임 등에 대한 공직 사회의 우려가 커졌다”면서 “한전이 정부 지침을 즉각 따르지 않은 것은 적폐 청산 학습효과와 일부 소액주주들의 배임죄 고발 가능성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앞서 지난달 10일 국회에서 열린 당·정·청 민생 현안회의에서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이 마이크가 켜진 줄 모르고 “관료가 문제”란 대화를 나눈 것도 적폐 청산 움직임과 무관치 않다. 당시 이 원내대표가 “정부 관료들이 말을 덜 듣는다”고 말하자 김 실장은 “(정부 출범) 2주년이 아니고 마치 4주년 같다”고 공감을 표시했다. ‘관료들이 말을 덜 듣는다’는 것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몸을 사리는 ‘복지부동’에 가깝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정부의 한 부처에서는 현안 회의를 열기 전에 참석자 전원에게 휴대폰을 밖에 두고 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정권이 교체돼 법적 책임을 물을 경우에 대비해 공무원들이 상관의 지시를 휴대폰으로 녹취하거나 수첩에 메모하는 일이 일상화됐기 때문이다. 경제 부처의 젊은 공무원들 사이에선 정책 보고서를 만들 때 ‘과수’(과장 수정), ‘국수’(국장 수정) 등 누구의 지시로 수정했는지 표기한 파일을 만들어둔다고 한다. 이에 따라 고위공무원은 부하 직원 앞에서 극도로 말을 조심한다. 공무원들의 복지부동 현상이 나타난 첫째 이유는 문재인 정부의 과도한 ‘적폐 청산’ 몰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이밖에 무리한 ‘코드 인사’·‘낙하산 인사’와 검증되지 않은 정책을 밀어붙인 것도 문제였다.
이 같은 적폐 청산 후유증을 해결하려면 ‘공직 사회와 공공기관을 흔드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불려온 당청이 먼저 달라져야 한다는 주문이 많다. 한 전문가는 “청와대가 만기친람 행태에서 벗어나 각 부처와 공공기관에 정책 수립과 집행을 위한 자율적 권한을 많이 줘야 한다”면서 “코드·낙하산 인사를 자제하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기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1일 청와대 정책실장과 경제수석을 동시에 교체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문 대통령은 김수현 정책실장 후임에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을, 윤종원 경제수석 후임에 이호승 기획재정부 1차관을 각각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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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사=김광덕 뉴스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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