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부터 주말에 가까운 산을 찾아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산을 오르며 느끼는 적당한 긴장감도 좋고, 아득히 먼 능선으로 부터 전해 오는 계절의 변화를 바라보는 일도 즐겁다. 날씨가 궂어서 산행을 몇 주 거르는 사이 숲에도 봄이 와 있을 것이어서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집을 나섰다. 옷깃 속으로 파고드는 바람은 아직 차가웠지만 등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햇살은 봄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시간이 이른 탓인지 산 중턱에 이르러서야 멀리 사람이 보였다. 내가 모퉁이를 돌면 나타났다가 한참을 따라가면 그가 산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를 놓칠 새라 조급해 하며 발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멀리 그가 보이면 안도했고, 보이지 않으면 불안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낯선 그를 따라 가며 의지하고 있었다. 아마 그도 내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에서 처음 만난 사내와 내가 그렇게 산 정상에 오르기까지 서로 의지하며 동행한 하루로 기억한다.
오래 전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함께 했던 교우가 오랜 유학생활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어렵게 학위과정을 마치고 오랜 시간 연구직을 떠돌다 모교의 교수가 되어 갔으니 그에게는 금의환향인 셈이었다.
그러나 10여년의 세월은 가혹하기도 해서 그의 성공을 가장 기뻐하셨을 노모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나셨으니 아쉬운 귀향이기도 했다.
가난한 유학생활에서도 그는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고, 작은 살림살이에도 허둥거리던 그의 아내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가계를 책임지는 가장이 되어 있었다. 작은 교회는 그와 그의 가족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그가 모교의 교수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은 한없이 축하할 일이었으나, 막상 그와 함께 했던 사소한 일상도 떠나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서운함이 먼저 밀려왔다.
사실 내가 그와 함께 했던 기억은 참 사소한 것이었다. 지극히 소박한 식탁에 마주 앉아 일상의 고민을 나누거나, 악수를 나누며 손에 따뜻함을 묻혀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내 손에 전해오는 그의 온기로 그와 내가 서로를 응원하고 있음을 짐작할 뿐이었다.
그러나 나와 그의 시간 안에 이 사소한 일들이 오래 동안 기억에 남아 있을 거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어쩌면 그보다 내가 더 오래 기억하고 있을 거라는 짐작이 내 서운함의 근원일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먼 이국땅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동안 맺어진 인연들은 늘 그렇게 떠나거나 혹은 남겨지는 것에 대한 끝없는 적응이었다. 그래도 함께 한 시간을 기억하고 간직하는 것이 남은 자의 몫이라 여기기로 한다. 산에서 우연히 만났던 이름 모르는 사내도, 오랫동안 이웃으로 살며 정을 나눈 교우도 내 시간 안에서 소중한 인연이었음을 믿는다.
바람에 꺾여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에 새 순이 돋았다. 꺾이기 전부터 순이 움트고 있었는지, 땅에 떨어져서도 악착같은 생명력으로 새 순을 밀어낸 것인지 모를 일이나 안쓰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내가 집안으로 들여와 햇볕이 드는 거실 창가의 화병에 꽃아 두었다. 보름여 시간이 지나니 봉오리가 붉게 물들어 간다. 마침내 막막했던 그 겨울을 함께 건너온 것이다. 꽃의 이름은 모르지만 이름을 가진 특별한 존재로 느껴졌다.
꽃은 절대로 시들 때를 근심하지 않는다던 말이 생각난다. 철없이 만개하는 것이야 말로 살아남았다는 떳떳함이고, 그래서 더 아름다운 것이리라.
꽃이 그러하듯, 시들 때를 근심하지 않고 이 순간을 후회 없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 삶 안에 자기를 넘어서는 힘이 있는 거라면 지금이라도 다시 그 힘을 믿고 싶은 것이다. 봄이 왔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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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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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절대로 시들 때를 근심하지 않는다... 값진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