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바라 윈 여사, 한국서 순직한 조부 로저 얼 윈 선교사 사진자료 등 공개

1919년 3월22일 열린 이석규 김선경 부부의 결혼식에 함께한 로저 윈 선교사. <사진제공=바바라 윈>

손녀 바바라 윈 여사
뉴욕한국문화원(원장 조윤증) 등이 뉴욕주의회 제정 ‘3.1 운동의 날’을 축하하고자 지난 28일 맨하탄 머킨 콘서트홀에서 개최한 ‘한국 가곡의 밤’에는 뜻 깊은 순서가 마련돼 진한 감동을 주었다.
400여명이 객석을 채운 이날 공연에는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 순직한 미국 선교사 로저 얼 윈의 손녀인 바바라 윈 여사가 참석, 100년 전의 한국을 간직한 할아버지의 사진 등 자료들을 공개하며 서슬 퍼런 일제 시대에도 이어진 배움과 신앙에 대한 한국인들의 뜨거운 열정을 나누었다.
윈 여사는 윈 선교사의 차남인 앨런 윈 목사의 딸이다. 바바라 윈 여사는 “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은 그 시절 한국생활 이야기를 이번 콘서트에서 나눌 수 있어 감격스럽다”며 “어린시절을 한국에서 보낸 아버지는 틈만 나면 안동의 감나무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고 말했다.
할아버지 로저 윈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회가 안동으로 파송한 29명 중 안동에서 순직한 유일한 선교사였다. 엔피린 대학과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한 그가 아내인 캐서린 루이스와 함께 북장로회 선교사로 파송된 때는 1909년. 1914년까지 5년 동안 그는 부산 선교부 소속으로 부산 원림 교회와 1912년 밀양교회, 등에서 시무하며 부산과 밀양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1914년부터 1922년까지 그는 안동 선교부 소속으로 안동에서 활발한 선교 활동을 진행했다. 로저 윈 선교사는 동료 선교사와 함께 1920년 안동 금곡동에 전도사 양성을 위해 남녀 성경학교를 열었다. 소식을 들은 한국인들이 몰리며 배움과 신앙에 대한 갈증을 채웠다.
하지만 로저 윈 선교사의 후학 양성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22년 11월22일 이질에 걸려 40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아내 캐서린 루이스 여사는 남편이 사망한 후에도 한국을 떠나지 못했다. 루이스 여사는 2남 1녀의 자녀와 함께 평양 선교부로 전임, 평양 고등성경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1926년 미국으로 귀국했다.
바바라 윈 여사는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 귀국 기회가 있었지만 한국에 대한 애정과 먼저 떠난 남편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4년을 더 한국에 남았다”며 “한국에서 태어나 14살까지 살았던 아버지는 안동 지도를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안동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했다”고 말했다.
한편 로저 윈 선교사를 비롯한 안동 지역 1세대 선교사들의 희생을 거름삼아 2세대 선교사들은 안동 경안고를 세우게 된다. 안동 경안고의 선교사의 묘역에 로저 윈 선교사는 ‘인노절’이라는 한국이름으로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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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희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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