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전 뉴스’가 뭔지 모르는 한인들이 많을 것 같다. 1980년대 한국사회에 회자됐던 세태풍자 속어다. TV방송 앵커들이 시청률이 가장 높은 9시 뉴스에서 시그널이 땡하고 울리자마자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이라며 시시콜콜한 전 대통령 행적부터 보도했다. 다른 커다란 사건이 터진 날도 예외가 아니었다.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의 압력 탓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4공화국 시절 많은 기자들이 유신정부에 항거하다가 강제해직 당했지만 전두환의 5공화국은 한국언론에 더 모진 시련을 안겨줬다. 많은 신문방송이 폐간‧폐쇄되거나 통폐합됐다. 한국일보 자매지 서울경제도 문을 닫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언론계 출신 고위 관리들이 언론탄압을 진두지휘했고, 그에 부화뇌동하는 어용 언론인들이 속출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30여년전 생각이 새삼 떠오른 것은 언론자유의 천국인 미국에서 요즘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계열의 공룡 언론기업으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나팔수 역할을 자임하는 싱클레어 그룹이 전국의 산하 방송국 앵커들에게 트럼프의 언론관을 반영하는 메시지를 방송 중 필수적으로 낭독하도록 강요해 파문이 일고 있다.
싱클레어 본사의 스캇 리빙스턴 뉴스담당 수석부사장이 쓴 이 1분짜리 ‘필수 보도문’은 “다른 언론사들과 소셜미디어의 가짜 뉴스 및 진위 확인과정 없이 자신의 정치적 편견대로 보도하는 기자들”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작년 선거유세 때부터 CNN, NBC, 워싱턴포스트 등 자신의 적대 언론들을 ‘가짜 뉴스의 본산’으로 매도해온 트럼프 대통령의 말과 같다.
매릴랜드에 본사를 둔 싱클레어는 전국 81개 광고시장 권역에 173개 방송국을 소유한 미국 최대 TV방송국 기업이다. 작년선거에서 트럼프가 몰표를 얻은 공화당 텃밭에 대부분 산재한다. 싱클레어가 야심대로 시카고의 트리뷴 미디어 그룹을 인수하면 소유 방송국이 42개 추가되고 아직 지역 방송국이 없는 뉴욕, 시카고, LA 등 대도시에도 진출하게 된다.
싱클레어의 필수 보도문을 하달 받은 지역 방송국들이 술렁였다. 기자들은 정치적 압박이라며 성토했고 앵커들도 언론정도에 어긋난 메시지를 앵무새처럼 뇌까릴 수 없다며 울분했다. 하지만 장기 고용계약 상 사표를 낼 경우 거액의 벌금을 물게 되므로 대다수가 어쩔 수 없이 지시를 따랐고, 그 이후 시청자들로부터 줏대 없는 언론인이라는 비난을 들었다.
신바람 난 트럼프가 불길에 부채질을 했다. 그는 지난 2일 트위터에 “웃긴다. 내가 보기에 가장 부정직한 가짜 뉴스 언론들이 싱클레어가 편견적이라며 비판한다”고 조롱하고는 “싱클레어는 CNN보다 우수하고 NBC보다는 훨씬 더 그렇다. NBC는 완전 농담방송이다”라고 덧붙였다. 싱클레어 방송국 중 25개가 NBC 프로그램 제휴사라는 걸 몰랐던 모양이다.
놀랍게도 한인 여성앵커가 맨 먼저 공개적으로 트럼프에 대들었다. 시애틀 싱클레어 방송국인 KOMO-4의 매리 남씨이다. 그녀는 “웃긴다”는 트럼프 말에 “전혀 웃기지 않는다”고 맞받아치고 “공룡 미디어 그룹이 지역 방송국들을 마구잡이로 삼키면 반동이 일어난다. 싱클레어가 트리뷴까지 매입하도록 당신 행정부가 파란 불을 켜줄 터인가”라고 트윗했다.
한국에서 태어나 4살 때 부모를 따라 이민 온 남씨는 워싱턴주립대를 졸업하고 스포켄 TV방송국에서 기자로 뛰다가 2003년 KOMO에 발탁됐다. 현재 오후 4시, 6시 및 11시 뉴스를 맡은 톱 앵커이며 에미상 후보로 여러 번 올랐다. 십수년전 한국식품점에서 만난 그녀는 화장기 없는 민낯에 매우 검소한 차림이었다. 이젠 그녀도 두 아들을 둔 불혹 나이이다.
어용언론 싱클레어가 필수 보도문을 시작으로 2020년 트럼프 재선 캠페인 때는 ‘땡 트럼프 뉴스’ 까지 강요할지 모른다. 하지만 싱클레어도 ‘땡전 뉴스’에 앞장섰던 MBC와 KBS의 전례처럼 시청자들의 외면을 살 뿐이다. 어쨌거나 모두가 잠잠할 때 한인 매리 남씨가 맨 먼저 트럼프에 펀치를 날린 게 흔쾌하다. 딸 뻘인 그녀가 4‧19세대인 내 마음에 쏙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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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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