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고등학교 졸업행사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졸업 행사들을 보면서 미국의 고등학교 아이들은 한국과 달리 어른이 되는 과정을 지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마다 프로그램이 다르기는 하지만, 어떤 학교는 시니어 프로젝트를 졸업 전에 발표하게 한다.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를 학교의 도움 없이 스스로 찾아내고 연구해 모든 사람 앞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하게 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대학교에서나 하던 일이라 정말 대견해하며 참관했다. 한 아이는 백파이프를 배우고 싶다고 7개월 동안 고속도로 포함 30분이 넘는 곳까지 매주 레슨을 받으러 다니고, 행사 당일 학교에서 그 요란하면서도 멋진 소리를 들려주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타주로 진학하기 위해 떠나는 아이들도 물론 있지만, 아직 대학 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스스로 군대나 직업을 찾는 아이들도 심심치 않게 보면서, 미국의 고등학교 졸업이 내가 한국에서 졸업할 때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정말 의미 있고 인생의 큰 장을 여는 이정표임을 여러 차례 느끼게 된다.
또 하나 미국의 고등학교 아이들은 16살이면 운전할 수 있기에 자립의 의미가 조금은 더 현실적이다. 얼마 전 한 아이의 고등학교 졸업파티에서 만난 한 남성은 16살이 된 그 다음날 운전면허를 따서 운전을 하고 다니며 맥도날드에서 일했다고 한다. 한동안 동네 신문사일도 함께 하다가 맥도날드를 그만두고 신문사에서 일하며 고등학교를 마쳤다는 것이다.
친구 샤론 역시 그 시절에는 16살에 운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았다고 한다. 16살 되는 그날 면허를 따서 운전했다는 샤론은 곧 12학년이 되는 큰아들이 운전할 생각을 안 하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단다.
하지만 내가 자라온 문화와는 많이 다르다. 고등학교 때 원하는 과목을 찾아 듣고, 운전하고, 봉사활동하고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졸업식에 가운을 입고 한명 한명 졸업장을 안겨주는 게 당연하구나 싶어진다. 4년 동안,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며 서서히 어른이 되는 연습을 해나간 아이들에게 아낌없는 축하를 해주는 것이다.
나는 그 시절 어땠었나.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대학을 가고, 그러는 게 당연했고, 대학을 졸업하고도 여전히 부모 그늘에서 회사를 다녔다. 이런 얘기를 하면 미국 친구들은 놀라워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빨래 등 자기 일은 자기가 하기 시작하다가 대학교 가면서는 당연히 스스로를 책임져온 이들에게 나는 그야말로 응석받이로 자란 듯 보이는 것 같다.
한 조사에 따르면 대학생들이 일하지 않고 공부만 했을 때보다 일도 하면서 공부했을 때 학점이 더 높다고 한다. 미국 태생인 남편도 대학교 때 어느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가 일하며 공부한 후, 결국 그 회사에 입사했다. 친구 폴도 대학교 때 단 한 학기 동안 일 안하고 공부만 했는데 그때 학점이 가장 낮았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고등학교 때 이미 어른이 되는 이곳 아이들과 비교해 나는 정신적인 성숙에서 이리도 차이가 나나 싶어 조금 부끄러웠다. 나는 대학교 때 일하지 않은 학기가 훨씬 많았고, 그럼에도 학점은 별로 훌륭하지 않았으며, 대학 내내 고등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부모의 신세를 졌다. 고등학교 졸업식은 그냥 대학교로 가는 당연한 절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지난해 단 한 군데 대학교에만 원서를 내고 합격한 아이가 있었다. 그에게 왜 원서를 한 학교에만 내느냐고 물으니 아이는 ‘내가 갈 학교는 여기가 최선인데 쓸데없이 돈 들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야망이 없는 게 아니라 철이 들었구나 싶어 더 기특했다.
고등학교 졸업하는 아이들이 몸만 큰 애기인줄 알았는데 알면 알수록 의외로 속이 꽉 찬 어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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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민 / 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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