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부터 10년 넘게 미국사회에 휘몰아친 좌익색출 광풍은 “우리 미국 국무부 직원 중에 200여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매카시 연방상원의원의 폭탄발언으로부터 시작됐다. 매카시의 주장은 냉전에 따른 공포와 불안이 지배하고 있던 미국사회를 하루아침에 광기와 야만으로 밀어 넣었다. 이성은 실종되고 집단적 광기가 가장 문명적이라던 미국사회를 뒤덮었다.
마녀사냥은 지성인, 기업인, 할리웃 스타들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진행됐다. 이를 피해 해외로 도피한 인사들까지 있었다. 다행히 미국사회는 이성과 지성의 기제를 다시 작동시켜 피해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폭탄발언을 하던 매카시는 “이 안에 공산주의자들의 명단이 있다”고 소리치며 가방을 흔들었다. 이것은 빈 가방이었음이 훗날 밝혀졌다.
오래전 미국사회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매카시 망령이 안타깝게도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끈질기게 배회하고 있다. 선거 때는 물론이고 평소에도 툭하면 터져 나오는 ‘색깔론’이 그것이다. 자신과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종북좌파’니 ‘빨갱이들’이니 하는 딱지를 습관적으로 붙이는 국민들이 있다. 특히 고령층에서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인식이 환경과 교육의 산물임을 감안할 때 이 같은 행태가 조금은 이해된다. 전쟁의 참화를 직접 겪었거나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으며 자란 세대에게 이런 반응은 일정 부분 본능적인 것이다. DNA처럼 뇌리에 깊이 각인된 인식은 그 세대가 물리적으로 소멸하기 전까지는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수구 기득권 세력이 이를 적극적으로 부추겨 정치적으로 이용해 왔다는 사실이다. 기득권 유지의 수단으로 색깔론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왔다. 예일대 사학과 교수인 티모시 스나이더는 진실을 훼손하는 방식의 하나로 ‘샤머니즘적 주문’을 든다. 끝없는 반복을 통해 허구를 그럴 듯하게 변모시킨다는 것이다.
스나이더 교수는 ‘샤머니즘적 주문’의 달인으로 트럼프를 꼽았다. 트럼프는 경쟁자들에게 ‘거짓말쟁이 테드’와 ‘부정직한 힐러리’라는 별명을 붙여 반복적으로 사용해 이들에게 정형화된 이미지를 씌우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그의 지지자들도 뒤따라 이를 떠벌이기 시작했으며 유세장은 ‘장벽을 건설하라’ ‘힐러리를 감옥으로’ 같은 구호들로 뒤덮였다.
색깔론이 확대재생산 되어온 과정도 이와 유사하다. 정치인들과 언론 등 수구세력이 던지는 색깔론 프레임은 지지자들의 입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확산돼 왔다. 지난 26일 부산에서 50대 재미한인이 더불어민주당 유세차량에 올라가 “야! 이 빨갱이 새끼야”라고 소리 지르며 선거운동원의 멱살을 잡고 행패를 부리다 체포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해프닝이지만 스나이더 교수가 말한 샤머니즘적 주문의 생생한 사례를 본 것 같아 씁쓸하다.
이번 대선에서도 어김없이 예의 색깔론 공세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약발이 다했는지 별로 먹혀들지 않고 있다. 유권자들이 안보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할 후보로 꼽은 것은 오히려 색깔론 공격의 주 타깃이 된 후보다. 유권자들이 그만큼 자기 판단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얘기다. 철 지난 색깔론에 점점 더 많은 국민들이 식상해하고 있다. 색깔론을 부추겨온 수구세력의 지난 9년은 확실한 학습효과를 안겨줬다. 이들이 흔들어대는 가방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알아차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색깔론은 완전히 설자리를 잃을 것인가. 이번 대선을 계기로 시대착오적인 색깔론이 사라져야 한다는 당위론적 희망을 가져보지만 낙관은 이르다.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레드콤플렉스’의 뿌리가 워낙 깊기 때문이다. 결국 색깔론을 불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공세의 대상이 돼온 세력이 괜찮은 안보성적표를 받아드는 것뿐이다. 정치적 수사나 구호가 아닌, 실력과 실적으로 색깔론을 잠재우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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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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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총 2건의 의견이 있습니다.
색깔론은 없어지지 않을겁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니까...
아닌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