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타계 25년만에 뉴욕서 2개 전시회Charlotte
▶ 파격적인 실험예술로 기존의 전통 파괴

샬롯 무어맨이 1971년 ‘TV 첼로’를 연주하고 있다. <사진 Takahiko Iimura>

1973년 서독에서 누워서 연주하고 있는 샬롯 무어맨. <사진 Hartmut Beifuss>

1965년 백남준을 부둥켜안고 공연하는 샬롯 무어맨. <사진 Barbara Moore>
샬롯 무어맨(Charlotte Moorman)은 베이비붐 세대 미국인들에게 ‘토플리스 첼리스트’로 유명하다. 예술 좀 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방가르드 행위예술가, 혹은 백남준의 예술 동료 정도로만 알려진 게 전부다.
그러나 그녀는 1963년부터 1980년까지 뉴욕에서 매년 개최된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의 창시자였고, ‘미친 생각을 하라’(Think Crazy)는 페스티벌 슬로건에 가장 충실한 라이프를 살았던 진정한 아티스트였다.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시아 스태디엄, 스태튼 아일랜드 페리 등지에서 열렸던 이 페스티벌에는 존 케이지나 요코 오노, 존 레넌, 칼하인츠 슈톡하우젠 같은 유명인도 참가했지만 대개는 무명의 전방위 아티스트들이 몰려들어 전통을 부수는 온갖 아이디어를 실행하는 예술축제를 벌였다.
그 중심에 있었던 샬롯 무어맨은 당시에 온갖 물의를 일으키며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곤 했지만 1991년 58세로 타계한 후 점차 주류 예술계에서 잊혀져갔다.
그러나 최근 그녀의 특별한 예술세계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2014년 조운 포스퍼스가 쓴 인상적인 전기의 출간을 시작으로, 올 가을에는 그녀에 관한 2개의 전시가 잇달아 열림으로써 20세기 전위예술의 기반을 다진 샬롯 무어맨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있다.
뉴욕대학의 그레이 아트 갤러리에서 열리는 ‘경악의 향연: 샬롯 무어맨과 아방가르드,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A Feast of Astonishments: Charlotte Moorman and the Avant-Garde, 1960s-1980s)가 그 하나고,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인근의 뉴욕대 페일즈 도서관에서 열리는 ‘아무것도 버리지마’(Don’t Throw Anything Out) 전시다.
둘다 무어맨의 방대한 자료가 남아있는 노스웨스턴 대학 뮤지엄의 협조로 기획된 것으로 수백점의 사진, 비디오, 오디오, 오브제를 망라하고 있다. 굉장히 복잡한 쇼지만 한번 전시장에 들어서면 무어맨이라는 독특한 여인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고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무어맨은 1933년 아칸소 주 리틀락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랐고 두각을 나타냈던 그녀는 학창시절 친구들이 “대단히 비범했고, 굉장히 특이했던 친구”라고 기억하고 있다.
1952년 그녀는 리틀락의 미스 시티 뷰티풀로 뽑혔을 만큼 미모가 출중했다. 10세때부터 첼로를 배운 그녀는 음악대학으로 진학, 1957년 줄리어드 음악학교에 입학하면서 그녀의 인생 행로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줄리어드의 클래스메이트 중에는 일본인 바이올리니스트 켄지 고바야시가 있었다. 당시 뉴욕의 뉴 뮤직 문화에 심취돼있던 그는 요코 오노와 토시 이치야나기(존 레논과 결혼하기 전 오노의 남편)가 함께 살며 퍼포먼스 공간으로 사용하던 다운타운 로프트에 자주 드나들었다. 거기에는 아방가르드 아티스트, 음악가, 행위예술가들이 모여들어 희한한 해프닝을 벌이곤 했는데 거기에 매혹된 무어맨은 그 세계로 아예 들어가 버리게 된다.
아방가르드 예술의 프로모터로 나선 그녀는 1961년 요코 오노의 카네기 리사이틀 홀 솔로 데뷔를 주선했고, 2년 후에는 자신이 기획한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을 시작했다.
그런 한편 존 케이지의 ‘현악연주자를 위한 26'.1.1499’를 자주 연주함으로써 자신의 레퍼토리로 만들었는데 이 곡은 연주자가 악기소리 외에 자기 맘대로 소리와 액션을 집어넣는 연주곡으로 유명하다. 이 곡을 자니 카슨의 투나잇 쇼에서도 연주했던 무어맨은 나중에는 그녀가 연출한 소리와 액션과 연주가 도를 넘어서자 존 케이지가 격노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즈음 어느 시점에 그녀는 백남준을 만났다. 존 케이지를 통해서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당시는 백남준이 비디오 아티스트로서 명성을 얻기 전, 작곡가 겸 행위예술가로 활동하던 시기였다. 서로 근본적으로 갈망하는 예술적 비전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된 두 사람은 이후 오랫동안 동지로 활동하며 파격적인 실험예술의 세계를 펼쳐보이게 된다.
이번 그레이 아트 갤러리의 전시는 두 사람의 오랜 파트너십을 기록한 자료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무어맨은 첼로를 예술적 자기표현을 위한 도구로 계속 사용했고, 백남준은 그것을 이용한 부조리의 에로티시즘을 표현했다.
두 사람이 함께 한 프로젝트로는 가히 지금 관점으로도 경악스럽다. 상의를 벗은 채 연주한 ‘오페라 섹스트로닉’(Opera Sextronique, 1967), 소형 텔레비전 2대를 테이프로 벗은 가슴에 붙인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TV Bra for Living Sculpture, 1969), ‘TV 첼로’(TV Cello, 1971) 등 전대미문의 퍼포먼스가 요구되는 것들이 손꼽히는데 무어만은 그녀만의 상상력과 헌신적인 태도로 언제나 완벽한 퍼포먼스를 이루어냈다.
‘오페라 섹스트로닉’의 공연 때 그녀는 1악장에서는 비키니를 입고 마스네의 ‘엘레지’를 연주했고, 2악장 때는 검은 스커트만 입은 채 상반신을 완전히 벗고 맥스 매튜스의 ‘국제 자장가’를 연주하다가 경찰이 출동해 ‘외설적인 노출’이라는 죄명으로 체포됐다.
무어만은 연주를 중단한 채 연행됐으며 이 사건이 대서특필되면서 ‘토플리스 첼리스트’란 별명을 갖게 됐다. 그녀는 그 외에도 완전 누드로 얼음덩어리를 껴안고 연주하는가 하면 온몸과 첼로에 초컬릿을 바른 후 연주하는 퍼포먼스도 벌였다.
백남준은 그런 갖가지 우여곡절을 함께 겪으며 15회나 지속된 무어만의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여하며 이후 30여 년간 협업을 계속했다.
무어맨은 끊임없이 거의 강박적으로 자신의 행적을 기록했다. 연필과 잉크로 작성한 페스티벌의 모든 세부사항 계획도면들과 페스티벌을 방문한 유명인사들과 찍은 사진들, 폴란드 화가 마렉 코니에츠니가 제작한 ‘미친 생각을 하라’의 오리지널 배너 등을 모두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글들과 남편 프랭크 필레기(Frank Pileggi, 1940-1993)에게 보낸 짧은 연서들도 함께 전시돼있다.
1979년 무어맨은 유방암 진단을 받고 유방 제거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1980년대 초 암이 재발했고 이후 1991년 타계할 때까지 시간마다 육체의 통증과 모르핀에 의한 완화 효과 등의 병상일지를 꼼꼼히 기록했다. “내가 공연하고 있는 것을 아는 한 나는 오케이”라고 기록했던 그녀는 생의 마지막까지 정상적인 행위를 거스르는 반 상업적 예술가로서 활동했다. 그녀가 남긴 엄청난 양의 유물은 2001년 노스웨스턴 대학에 기증됐다.
뉴욕에서 열리는 2개의 전시는 무어맨이라는 20세기 예술계 거인을 조명하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하지만 결코 빙산이 아니었던 그녀는 뜨겁게 확산되는 통제 불능의 큰 불길이었으며 그것이 타오르면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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