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던 봄이 왔지만 그렇다고 '이제 봄이다.'라고 말하기에는 이른 새벽과 한낮의 기온 차이가 너무 커서 하루를 보내는 마음이 덩달아 변덕스럽다. 겨우내 언 땅 속에서 잠들어 있다 고개를 내민 수선화가 처음으로 노란 꽃잎을 열던 아침에는 느닷없이 눈까지 내려 하얀 얼음 모자를 뒤집어 쓴 채 고개를 숙여야 했다. 잠시 망설이다 세탁해서 넣어 둔 묵직한 외투를 다시 꺼내 입었다.
이른 아침의 출근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두툼한 무채색 외투의 깃을 세우고 하얀 입김을 내 뿜으며 바쁘게 발걸음을 옮겨 놓는다. 그래도 한 낮의 짧은 햇살에 마음까지 나른해 지는 걸 보면 봄이라고 불러도 좋은 날이다. 3월에만 볼 수 있는 공존의 모습이니 3월을 경계의 달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시계는 불투명하고, 남겨진 길은 멀고, 그렇다고 되돌아 온 길은 보이지 않는, 계획과 의욕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는 3월이다.
서재 한 귀퉁이에는 오래된 드럼세트가 놓여 있다. 큰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 했을 때 입학 선물로 사준 것이다. 낯선 환경에서 그 또래의 사내아이들이 맞이하는 사춘기를 큰 아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늘 걱정이 되었었다. 갓 이민 와서 나 또한 새 생활에 적응하느라 부담이 되던 시기였으니 아이의 드러내지 않는 마음을 헤아리고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은 왠지 부담스럽고 버거운 일처럼 느껴졌다.
힘들고 답답할 때 드럼을 치며 꺼내 놓지 못하는 감정을 풀어 내 보라고 했지만, 유난히 부끄러움이 많았던 나의 힘든 사춘기를 기억하니 내 아이만은 나와 같은 경험을 반복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더 컸었다.
다행히도 아이는 가슴속에 담아둔 불안정한 감정들을 음악과 함께 자연스럽게 폭발해 냈고, 그렇게 표출된 감수성은 아이에게 풍요로운 사춘기를 보낼 수 있게 도와주었다. 친구들과 밴드를 만들어 뉴헤이븐의 작은 홀을 빌려 연주회도 하는 등 모두가 부러워하는 학창 시절을 보냈고, 대학을 마칠 때까지 드럼이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
십년을 함께 한 드럼이지만 아이가 이사한 맨해튼의 좁은 아파트로는 따라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이가 집에 드럼을 내려놓고 가던 날 부터 나도 왠지 드럼을 배워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서재 한 구석에 자리를 마련해 드럼을 들여 놓은 지 벌써 4년이 지났다. 이번에도 배울 기회를 놓치면 또 다시 풀지 못하고 밀어 둔 숙제처럼 바라만 보아야 할 터이니 퇴근 후 시간을 내어 보기로 했다. 때마침 지난주부터 서머타임이 시작되면서 일과 후 길어진 저녁시간에 여유가 생겼다.
드디어 며칠 전 처음으로 드럼 세트 앞에 앉아 보았다. 마음껏 두드리고 싶은 욕구를 꾹 참고 아이가 가르쳐 주고 간 박자를 기억해 내 가며 손발을 움직여 보지만 뭐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교본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아직은 읽지 못하는 난수표일 뿐이다.
한 시간 남짓의 지루한 연습 끝에 리듬 하나에 간신히 익숙해 졌지만 겨우 소음만 면했을 뿐 아직은 음악으로 들리지 않는다. 단조로움에 짜증이 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즈음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 아이는 이 지루한 과정을 어떻게 견뎌 냈을까? 아이의 고민과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 지난날에 미안함이 밀려왔다.
지금의 내가 누리는 것은 정석과 교본에 충실할 때에만 리듬을 느낄 수 있는 지극히 하수의 기쁨이다. 그러나 이 반복된 연습 후에 반드시 아이가 연주하는 스윙에도, 또 재즈에도 도전 할 날이 올 것이다. 언젠가 도달 할 원숙한 리듬의 세계를 꿈꾸며 오늘도 잠시 북 채를 잡아 본다. 가슴속에 깊이 묻어 둔, 이미 무뎌진 감정들이 북 소리의 떨림에 반응하며 가볍게 흔들린다. 무더운 여름이 가고 온 산야에 단풍이 물들 즈음 아내와 아이들을 앉혀 놓고 그동안 내가 익힌 리듬으로 작은 음악회를 여는 상상만으로도 벌써 설렌다.
<
최동선 <전 커네티컷한인회장>>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