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큐”라는 말, 짧고도 귀여운 어감이다. 미국의 일상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용어가 “땡큐”라는 말이 아닐까 싶다. 처음 이 땅에 와서 “땡큐”가 구구절절 따라붙는 미국인의 언어 습관에 자못 놀라면서 참으로 양반 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경우건 상대에게 감사하다는 표현은 인간의 질을 격상시키는 일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감사하다”는 전제 하에서 보면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다. 금년에도 한해를 감사드리는 ‘땡스기빙’이 어느새 우리 곁에 왔다. 우리나라에도 햇곡을 감사드리는 추석 명절이 있다. 가족과의 만남을 위하여 천리 길을 멀다 않고 ‘민족의 대 이동’이라 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고향 길에 오르는 풍습도 추석과 땡스기빙은 유사하다. 오직 다른 점은 우리는 송편을 빚고 이 나라 사람들은 터키를 굽는다.
갈색으로 먹음직스럽게 익어서 테이블 중심을 장식한 터키를 보고 있으니 어머니가 빚은 하얀 송편이 어른거린다. 맵쌀가루를 익반죽하여 손으로 빚은 어머니의 송편은 반달 모양이었다. 지방에 따라 송편 모양은 좀 다르나 빚은 떡은 일단 솔잎을 깔고 찌기 때문에 송편이다. “고물은 많이 넣되 배가 터져서는 안 된다”고 이르시고 치맛바람을 일으키듯 분주하게 부엌 쪽으로 가시던 어머니가 언뜻 눈앞을 스친다.
솔 향을 즐기는 민족, 춥지도 덥지도 않은 절기에 갈매색 하늘 갈피에 흰 구름 뜨는 날이면 우리의 대 명절 ‘추석’이 온다. 그런데 요사이 달력을 보면 땡스기빙은 적혀 있으나 우리의 명절 ‘추석’이 표기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우리말로 쓰인 달력에 ‘추석’이 기록되지 않음이 섭섭하다. 새것에 취하여 옛것을 미련 없이 버리는 매정함인 듯하여 더욱 마음이 편하지 않다.
달력에서까지 우리의 대 명절을 기록하는 일에 소홀하다니, 요란한 명절 축제가 없어도 좋다. 적어도 그날을 표시 하는 일 만큼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누대에 얽힌 인연을 헌신짝 버리듯이 하는 경우가 연상되어 가슴이 스산해진다.
좀 더 말하자면 또 하나 섭섭한 사연이 있다. 디아스포라 문화권에서 만들어지는 송편은 만드는 방법도 모양도 근본을 잃어버린 채 이름만 송편으로 적혀있다. “이것은 송편이 아니다”라고 혼자 독백을 한다. 듣는 이도 없고 아는 이도 없다. 그러다가 한참 후에는 당연히 편의에 따라 시대에 따라 여건에 따라 문화는 변하는 것이 아니냐고 자답한다.
고향의 추석 달은 상처도 없이 그 모양 그대로 이 미국까지 우리를 따라왔지만 송편은 어느 강을 건너다 모양마저 변했을까. 본적지를 떠나 이 서녘 땅에까지 건너와서는 이름만 남기고 변신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경계에 사는 우리는 우리 송편의 변이과정을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미국에 온 첫해 땡스기빙에는 교과서식으로 구운 터키를 베어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을 흥얼거리다 목이 메던 유학생들로 집안이 가득 채워졌었다. 아름다운 청춘이었다.
남의 땅인 것만 같던 이곳에 수십 년을 살다보니 어느새 터키 굽는 일에도 익숙해졌고 그 진미도 알게 되었다. 엉뚱하게 먼 유럽식 남의 나라 음식도 내 음식인 듯 그리워 질 때가 있다. 꼬부랑말이 홍수를 이루는 이 땅에 나는 얼마만큼 동화되었는가?이제는 터키도 내 음식이고 송편도 내 음식이다. 어느새 여러 나라의 음식을 구별 없이 같은 냉장고에 넣어놓고 산다. 이것은 세계의 모든 문화를 한 용광로에 넣고 끓여서 경이로운 창조를 꿈꾸는 과정이 아닐까?더 이상 탓하지 말자. 송편이 그 본색을 잃었더라도 여기는 디아스포라의 영역, 멀고 먼 이국땅이다. 저 멀리 해 뜨는 동쪽에 자리한 내 조국 반도에는 손상되지 않은 원형의 송편이 솔 내음 속에 쫄깃하게 익어가고 있으리니 웅혼한 시각으로 보자.
문화는 거대한 변동으로 끝없는 호기심과 진정한 찬양을 불러일으킨다 했다. 그 이름만 남는다 하더라도 감사하지 않은가! 지역적 차이, 사회적 변화, 시대적 감각에 따라 새로 지어가는 문화에 인류는 유유히 휩쓸려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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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숙녀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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