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나 싶더니 기온이 100도를 넘어섰다. 아니 벌써 10월인데, 분명 가을인데, 일몰은 어느새 빨라져 6시면 어둑어둑 해지는데 … 이 계절은 이렇게도 더디게 변하는 것인가.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부러워하는 햇살 좋은 서던캘리포니아에 살면서 요즘 내가 털어놓는 배부른 불평이다.
하지만 분명히 시간은 가고 있고, 그 흔적이 단지 이 따뜻한 곳에서는 더디게 나타날 뿐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가끔 달리기를 하러 집 근처 엘도라도 공원에 간다. 공원에는 누렇게 변한 나뭇잎들 속에 서너 그루의 단풍나무가 숨어있다. 잎 서너 개만 성급한 마음에 빨갛게 색깔을 바꿨을 뿐, 나머지는 여전히 초록으로 싱싱하다.
얼마 전 혹시나 떨어진 단풍나무 가지를 가져다 물에 꽂아두면 살아날까싶어 들고 왔다가 처참히 말라버린 걸 목격하곤 그저 때를 기다리며 바라볼뿐이다.
동네 모퉁이를 돌면 하늘로 높이 자라있는 커다란 단풍나무가 이웃의 담벼락 뒤, 길가 쪽으로 심어져있다. 이 나무는 해를 등지고 있어서인지, 유난히도짙은 초록이다. 지난해 겨울이 지날 즈음에야 나뭇잎색이 울긋불긋 했던 기억을 떠올려 보면, 단풍은 좀 더 기다려야 하는 게 맞다.
세상은 바쁘고 할일이 많은데 속편하게 날씨며 계절 타령이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삶이 바쁠수록, 내가 서있는 이곳의 작은 변화를 살피며 눈치 채는 것은 삶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울창하던 나무가 잎들을 떨어뜨리고 달력의 그 달 숫자가 두자리로 바뀌기 시작하면, 이제 슬슬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바로 여행이다.
물건보다 경험을 사는 일에 투자를 하는 것이 행복감을 높이는 데 더 좋다는 발표들이 나오는 요즘, 여행은 경험의 최고상태다. 내가 가본 적 없는 곳에서 하루를 보내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과정들, 모르는 사람들과 우연히 대화를 나누고, 낯선 식당에서 새로운 메뉴를 보는 설렘.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과 몰입해있던 생각에서 강제적으로 벗어나 색다르고 예측 불허한 순간들에 나를 놓아두는 시간이다. 긴장과 흥분, 호기심과 즐거움이 몸속의 에너지를 마구 끌어올린다. 그래서 여행 후 집으로 돌아오면, 이전의 일상을 새로운 기분으로 대할수 있게 된다.
더구나 이런 경험은 기억에서 쉽게 없어지지도 않고 자꾸 떠올려도 지루해지지도 않는다. 몇 백 달러를 주고 산 물건보다 언젠가 갔던 여행을 기억하며 흐뭇해하는 즐거움이 더 오래오래 남는다.
이 가을, 그럼 어디를 가야하나. 저멀리 동부의 버몬트가 그렇게 단풍이좋다던데. 여기 서부에선 시애틀쯤은 가야 단풍이 울긋불긋할 텐데 …. 공상의 나래를 편다.
이 모두 너무 멀다면 준 레이크가 여기선 가장 괜찮은 가을풍경이니까 그리고 가보자, 했다가, 아이의 학교 스케줄, 주말 스케줄 때문에 결국 포기해야했다. 준 레이크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빨간 잎이 아니라 노랗다는, 정확하지 않은 누군가의 얘기를 듣고 서운한 마음을 달랜다.
그럼 남은 곳은 빅 베어다. 그곳에도내 마음이 기억하는 추억 속의 노란 은행잎과 빨간 단풍잎과 찬바람이 있을리는 만무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사는 곳보다 기온이 10도는 낮은 곳이라니, 아마도 가을 단풍여행 흉내 내기는 괜찮을 듯 싶다.
남가주의 날씨는 여전히 여름 같지만, 계절은 가을이다. 여행하기 가장 좋은 가을이다. 추워지기 전에 짐을 싸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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