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에도 봄은 왔다. 늦게 왔다고 탓하는 이는 없다. 자연은 와야 할 때를 알고, 가야 할 때를 안다.
이런 것을 자연의 순리라 하는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옆으로 젖히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봄 하늘은 언제나 친근하다. 가을하늘처럼 높푸르지 않다. 침실에서 건너다보이는 만개한 목련화에 시선을 모으자 삭막하게 단절되었던 세상과의 교류가 다시 이어진 듯 가슴이 화사해진다. 하얀 꽃잎의 밑 부분이 연분홍색이라서 멀리서 보면 분홍색 목련화라 할만하다.
내 유년시절에 보았던 자목련은 가지처럼 길쭉하게 봉우리 지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가지꽃’이라 불렀다. 때로 그 가지꽂이 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 이상하게도 목련화는 이른 봄에 한번 피고 나서 사철을 무료하게 서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머리에 남는다.
어느 꽃인들 그러지 않을까. 대부분의 꽃은 벼르고 벼르다가 일 년에 단 한 번 며칠을 장식하고 지는데 유난스레 목련에 대하여 그런 감정을 느끼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친정집 넓은 마당 둘레에 형제자매들이 각기 좋아하는 꽃나무 한 그루씩을 심기로 했을 때 동생이 목련을 권했지만 나는 듣지 않고 동백을 심었다. “목련화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 읽노라” 하는 노래를 즐겨 부르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4월과 지금의 4월은 어떻게 무엇이 다른 것일까? 실로 많은 4월을 살았다.
사실 목련화라는 이름은 동백이라는 이름보다 훨씬 낭만성이 강하다. 꽃나무 가지가 보이지 않을 만큼 한 번에 그득히 피었다가 꽃잎들이 해체하여 시들거리며 진다.
동백 꽃잎은 두텁고 꽃이 무겁다. 꽃이 질 때도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고 꽃모양 그대로 꼭지에서 쏙쏙 빠진다. 한 나무에 무성하게 많은 꽃이 피는데도 피고지고 연달아 몇 개월을 핀다. 벚꽃이나 목련화처럼 한 번에 활짝 피었다가 금방 허망하게 지지 않아서 좋다.
꼭지에서 빠져나온 꽃들이 땅위에 붉은 융단을 만들면 듬뿍 주워 치마에 싸가지고 와서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며 즐거웠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가을에는 동백열매가 풍성하여 그 열매로 어머니는 머릿기름을 짜셨다. 동백기름 윤택한 낭자머리에 금비녀는 어찌 그리도 보기 좋았던지. 낭자머리에 국화잠이나 나비잠을 꽂을 수도 있는데 너무 화려하면 점잖지 못해 격이 떨어진다고 절대로 꽂는 일이 없었다.
나는 어쩌면 그 동백 열매에 대한 애착 때문에 동백을 택했을까? 그렇다.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에는 밝은 미래가 있는 듯하여 내 자녀들의 훗날에 대한 꿈을 거기에 부여했을지도 모른다.
꽃다운 시절의 하루나 노년의 하루나 그 시간적 길이는 꼭 같다. 그 길이가 길고 짧음이 없으되 우리는 꽃다운 시절이 지난날의 전부였던 것처럼 기억하고 산다. 오늘의 초라함이 서운하여 가버린 날들을 더욱 빛났던 것으로 기억하고 아쉬워하며 사는 게 인생인 것 같다.
우리들은 지난날의 일들을 혼동하면서까지 행복했던 때만을 부풀려서 감싸 안는다. 단 대여섯 번의 가족 나들이가 수십 번인 것처럼, 단 두어 번의 행복했던 만남을 젊은 날의 전부였던 것처럼, 기억의 오류가 가져다준 선물도 그럴듯하다.
일 년 중 단 한번을 위하여 사는 꽃들에게 나는 많은 것을 배운다. 그 짧은 기간이 결코 짧은 것이 아니라는 그들의 속삭임, 그리고 오직 한번이기에 더욱 정성을 쏟는다는 귀띔도 듣는다.
이곳의 봄은 늦게 왔으니 늦게 온 만큼만이라도 좀 오래 머물러 주었으면 좋겠다. 봄 꽃 같은 고운 물감으로 봄을 한 장 멋스럽게 그려서 우리들의 속가슴에 간직하며 봄을 오래 만끽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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