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에 뜬구름 잡으려 말라” 나의 이민인생 철학
이라크전 당시 한인사회를 노랗게 물들였던 옐로 리본 캠페인을 기억할 것이다. 이 행사를 주최한 배시영 전 한미민주연합회 회장, 그는 피땀 흘리며 비즈니스를 일구었고 생활이 안정되자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그를 만났다
▲건강한 스포츠 문화 보급
지난 2011년 3월 같은 날 뉴욕대한체육회 두 회장이 취임하는 촌극이 있었다. 축구, 씨름, 태권도 등 21개이상 가맹경기단체의 수장자리를 놓고 다툼이 일자 역대 회장단협의회 중심의 원로들이 모였다. 이때 배시영은 화합을 유도하여 ‘동포와 함께 하는 뉴욕대한체육회’로 거듭나게 했다.
뉴욕골프협회 회장을 거쳐 88올림픽이 열리던 해 제4대 뉴욕대한체육회장에 선출된 배시영은 한인 사회봉사를 본격 시작했다. “샌프란시스코 전미대한체육회에 뉴욕청소년 200명을 비행기를 전세 내어 인솔해 갔다.
뉴욕, LA, 시카고 등에서 온 2,000여명이 모인 대회는 한인청소년들의 축제다. 대부분 맞벌이 나간 가정에서 아이들이 방과 후 운동을 하면서 건전한 하오를 보내게 하는데 체육회장으로서 보람 있었다. 비즈니스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가 아닌 체육회는 100% 순수한 봉사단체다. ”
배시영은 건강한 스포츠 문화를 한인사회에 보급하고 청소년들의 건전한 체육활동을 후원하는 뉴욕대한체육회에 대한 애정이 무한 크다.
▲옐로리본 캠페인
2003년 이라크전이 발발하자 다수의 미주한인들도 전쟁터로 나갔다, 당시 한국에서는 반미 데모가 격화되고 미국인들 사이에 반한 기류가 형성되는 기미가 보이자 배시영은 행동에 나섰다.
미주한인들의 불이익 사태를 방지하자는 취지하에 창립된 한미민주연합회는 이라크전 병사들을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게 하자는 ‘옐로 리본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협회는 또 한미동맹 50주년 기념 ‘2003년 뉴욕장사씨름대회’를 KBS와 공동으로 치렀다. 당시 그는 거금을 쾌척하여 100여명이상 한국 선수단을 뉴욕으로 초청해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렀고 수익금은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비 건립기금으로 전액기증 됐다.
씨름대회는 보통 1년에 5~6번 뉴욕메디슨스퀘어 가든, 퀸즈 칼리지, 애틀란틱 시티 등에서 열렸으나 현재 청과협회 추석맞이대잔치와 아시안 행사나 한인사회 특별행사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 “한국의 국기인 민속씨름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했다. 한번은 청과협회 추석맞이씨름대회에 선수가 없다하여 씨름선수로 출전해 동메달을 딴 적도 있다”고 파안대소하는 그다.
한미민주연합회는 그 외 북한인권문제 성토대회, 4.19혁명관련 영상 자료전 등 10년간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한인들이 미국사회에 이바지하고 있는 것이 주류사회에 인식되면서 자연스레 문을 닫았다.
▲4.19 혁명 동지회
배시영은 1938년 평양에서 사업가 집안의 3남 중 셋째로 태어났다. 평양사범 1회 졸업생인 아버지는 교사를 하다가 정미소, 피복 공장 등 사업을 크게 했고 아들들은 이 사업가 기질을 물려받았다. 7살 때인 46년 온가족이 남한으로 내려왔고 서울에서 성장했다.
집안 비즈니스인 조광양말은 6.25이후 날개돋힌 듯 팔려나갔고 국내 굴지의 섬유회사 조광산업으로 성장했다. 배시영은 중앙중고와 동국대 법정대 경제과를 졸업했는데 대학 3학년때 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신나고 재미있게 청춘을 구가하던 그는 1960년 독재정권과 부정부패에 항거한 4.19학생혁명 상임위원이 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인생 지침이 정해진다. 서울시내 34개 종합대학 대표들과 경무대에 들어가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키는데 함께 한 ‘혁명동지’를 말할 때는 지금도 얼굴이 상기된다.
4.19혁명동지회와는 미국에 이민 오면서 연락이 안되다가 4, 5년 전 연결이 되었다. 배시영은 국가제정건국공로훈장을 받았고 매년 200만원씩 국가 기금을 받고 있다.
▲앞치마 두른 부잣집 도령
배시영은 1961년 대학 졸업 후 조광산업에 입사, 64년~65년 뉴욕지사에 근무한 다음 한국으로 돌아갔으나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모든 것을 정리, 67년 미국으로 이민 왔다.
“31세에 이민 와서 내 나이 77세, 올해로 45년이 넘었다. 한국에서 보다 뉴욕에서 보낸 세월이 더 길다. 처음 장사를 하자니 돈이 없어서 소규모로 시작했다. 우유 델리가게를 열었는데 하루 매상이 120달러였다. 우유회사가 자본을 융자해주고 차차 갚아나갔다. 3년이 되어 가게가 안정되면서 좀더 큰 비즈니스를 하는 방식으로 덩치를 불려나갔다.”
가발행상, 튀김가게, 피자가게, 기프트샵, 수퍼마켓 등 이민 선구자로서 할만한 사업을 모두 거친 20년간, 배시영은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집에 가면 밤 11시가 되었다. 보통 하루 14~16시간씩 7일내내 일을 했다.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 설날도 없었다.
“해가 없을 때 나가고 해가 진 다음 집에 왔고 몸이 아파도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약 먹고 물건을 팔며 아팠다. 당시 미국은 기회의 나라였고 하는 만큼 보상받는다고 다들 믿었고, 노력했다. 너무 힘들어서 돌아가려 해도 비행기 티켓값이 없었다. 그때 같이 고생했던 이민 초창기 친구들은 지금 노후에 나름대로 밥 굶지 않고 산다.”
‘당시 밀크 반갤런값이 99센트’였다며 많은 품목의 가격을 상세히 기억하는 그는 “크리스마스나 추수감사절, 설날에도 일을 해야 했지만 늘 장사가 잘 되었던 것은 아니다. 롱아일랜드에서 수퍼마켓을 할 때는 캐셔 30~40명에 1만 스퀘어피트 면적의 매장에서 영업하다가 유니온이 관련되면서 비즈니스를 접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러자 한국의 친구들이 놀랐다. “학교에 벤츠 타고 오던 배시영이 앞치마 두르고 샌드위치 만들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그는 장사꾼인 아버지의 근면성실과 절약정신을 이어받아 ‘하나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불굴의 정신을 잊지않았다.
▲“뜬 구름 잡지 말라“
배시영은 1989년 재미대한체육회 회장 선거에서 1표 차이로 당선되지 못한 일이나 1991년 뉴욕한인회장 선거에서 김재택 교수와 경선하여 탈락한 일이 있다. 아쉽지 않느냐고 하자 그는 “세상사는 게 다 그런 것, 얼마나 힘든 일이 많은데,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고 한다.
그는 12년 전 비즈니스에서 은퇴하여 소유한 건물 매니저먼트 및 투자를 하고 있다. 특히 70년대 중반 창립시부터 공을 들여온 동국대 동창회 일에 ‘큰형님’으로써 회장, 이사장을 하면서 후배들과 골프애를 나누고 있다. 또 평양 태생인 그는 현재 이북 오도민회 이사장으로 매달 실향민들을 만난다.
“절대로 하늘에 뜬 구름을 잡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처음 세든 건물의 유대인 랜도르드가 이런 말을 했다. ‘비가 오면 처마 끝에 물이 떨어진다. 그 물을 마시지 말고 양손 안에 가득 찰 때까지 기다려라. 그다음 받은 손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받아먹으라, 네 손 안의 물은 그대로 일 것이다. 그러면 부자가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평생 가난하게 살지는 않을 것이다. 이 말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배시영은 부인 배동자씨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고 장남은 비즈니스, 차남은 아키텍트, 셋째아들은 치과의사, 막내딸은 변호사로 훌륭히 성장했고 출가한 아들딸로부터 손자 둘, 손녀 둘을 두었다.
“뉴욕한인사회에 300개 이상의 단체가 있다. 내 돈, 내 시간을 투자하여 봉사해야 한다. 남의 것으로 행세를 하면 욕을 먹게 되어있다. 앞으로 퀸즈한인회관이 생기면 체육관 강당을 오픈하여 청소년들이 방과 후에 모여서 태권도, 테니스, 농구를 하면서 건전한 몸과 마음을 성장시키기 기대한다.” 그의 노후가 편안하고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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