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약 열흘간의 일정으로 런던을 다녀왔다. 떠나기 전에 실로 궁금한 것들이 많았다. 영국이 어떤 나라였던가. 1200년 국왕의 권리를 최초로 제한한 ‘마그나 카르타’를 필두로 ‘명예혁명’을 거쳐 의회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온 나라, 산업혁명의 발상지로 한 때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전성기를 누렸으나 지금은 쪼그라든 영토에 ‘영국병’을 앓으며 쇠퇴해 가는 나라…21세기에 이 나라 사람들이 어떤 생각과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했다.
물론 10일간의 여행객이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으로 보고 온 것을 이야기하자니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혼자 상상한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가난한 양반의 자부심과 유럽식 사회주의의 흔적이 곳곳에 엿보였다. 그로서리의 캐시어들이 의자에 앉아 계산을 하는 모습도 놀라웠지만, 투어 버스들이 속속 도착하는 데도 셔터를 내리고 가버리는 상점 주인들은 오히려 신선하고 유쾌하게 다가왔다.
일상생활은 미국에 비해 훨씬 불편했다. 계좌를 트기 위해 은행(영국 굴지의 은행이었다)에 갔던 딸아이는 “예약을 하고 나중에 오라”는 말을 듣고 되돌아 왔다. 예약표에 적힌 날짜는 1주일 후였다.
타고 있던 버스와 지하철에서 느닷없이 내려야 할 때도 있었다. 시내에 택시 운전사들의 파업이 있으니(이들은 ‘우버’ 택시에 반대해 파업 중이었다) 더 이상 갈 수가 없다는 이야기였고, 기차역으로 향하던 지하철은 “기차역에 수상한 물건이 발견됐다”는 통보에 다음 역에서 사람들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누구 하나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불편함이 일상화된 듯한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우연히 런던 타워에서 보게 되었던 제 1차 세계대전 전몰용사 추모 행사였다. 올해가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지 100년이 되는 해인 줄 그 때 처음 알았다.
“Tower of London Remembers”라는 타이틀의 이 행사는 8월 5일부터 11월 11일까지 전몰장병 한 사람 한 사람을 기리는 88만8,246 송이의 붉은 양귀비 꽃(세라믹으로 만들었다)을 런던 타워의 성벽과 호숫가에 차례로 설치하고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행사였다.
매일 밤 핏빛 바다를 연상시키는 꽃밭 한가운데 설치된 단상에 촛불을 밝히고 사제와 장교, 낭독자 이렇게 세 사람이 올라와 100년 전 이름 없이 스러져 간 이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 주고 있었다.
국가 제창이나 묵념, 기념사 같은 형식적 절차 없이, 고작해야 후손들처럼 보이는 사람들 열댓 명 정도가 소박한 나무 벤치에 앉아 지켜보고 있었기에 오히려 진정성이 느껴졌다.
쌀쌀한 밤하늘에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그 이름들을 들으며, 나는 누군가의 사랑하는 아들이었고, 남편이었으며, 아버지였을 그들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100년 전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갔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음을 깨닫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각성이다. 권리라고 부를 것도 없이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일상들, 예컨대 직장에서 하루 8시간 근무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단순한 일상에도 앞서간 무수한 이들의 눈물과 피가 어려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한 사회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기준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를 대하는 태도, 환경에 대한 인식 등등 다양할 테지만, 역사의 희생자들을 잊지 않고 기릴 수 있는 것 역시 성숙한 시민의식의 소산이라 생각한다. 영국에서는 그것이 관제 행사가 아닌, 지역사회 주민들이 참여하여 자발적으로 이루어낸 행사였기에 더욱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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