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민희식(왼쪽 두 번째부터) 초대 LA 총영사가 한 모임에서 부인 전부귀 여사와 함께 미국인 여성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
남가주 한인 이민사회가 팽창하기 시작하던 1970년대 LA 총영사관저에서는 해마다 한국 국경일 기념행사가 열렸다. 1974년 관저에서 개천절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는 모습.
올해로 개설 66주년을 맞은 미 서부 지역 한국 정부 대표기관인 LA 총영사관은 남가주를 비롯한 관할 지역 한인 인구 급증 및 글로벌 시대의 도래와 함께 한류열풍 확산, 그리고 한인들의 주류사회 진출 등 시대변화에 맞춰 역할과 위상도 크게 변화해 나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LA 총영사관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조명해 보는 기획시리즈 두 번째 편으로 1980년대 격동의 시기를 거치며 1988년 LA 윌셔 블러버드 현재 위치에 새로운 총영사관 시대를 연 이후 현재까지의 역사와 향후 방향 등을 살펴본다.
<김철수 기자>
-------------------
■LA 폭동과 총영사관
90년대 한국의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LA 총영사관도 변화의 시기를 맞는다. 특히 90년대 초 미주 한인사회에서도 김창준씨가 한인 최초의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되는 것을 계기로 총영사관도 본격적으로 주류사회와의 교류에 나서는 등 공공 외교의 행보가 시작된다.
하지만 1989년 2월 부임한 박종상 10대 총영사는 재임기간 ‘정치력 신장’과 ‘4.29폭동’ 이라는 희비곡선이 교차한다. 당시 총영사관은 폭동이 발생하자 곧바로 공관에 대책위원회를 설치해 운영하는 등 나름대로 신속한 대응조치를 취했다.
LA 한인회는 당시 법정소송에 휘말려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결국 LA 한인상공회의소와 공동으로 폭동 범교포대책위원회를 꾸리며 피해를 수습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보내온 폭동 피해성금과 현지 모금액, 그리고 사용처 등 각종 의혹이 제기되며 LA 총영사관의 리더십이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박 총영사 뒤를 이어 부임한 김항경 총영사는 3대였던 노신영 총영사에 이어 가장 잘 풀린 LA 총영사로 손꼽힌다. 불과 1년여를 근무한 김 총영사는 캐나다 대사를 거쳐 외교통상부 기획관리실장에 이어 외교부 차관까지 굵직한 자리에 올랐다. 특히 세련된 매너와 화술을 자랑하던 김 총영사는 폭동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인사회를 특유의 친화력과 뚜렷한 주관으로 안정을 되찾도록 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그는 흑인사회와의 관계증진을 위해 흑인 학생들의 한국 연수 프로그램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후 1995년 2월부터 1998년 4월까지 공관을 이끌었던 박태희 12대 총영사는 소탈한 성격에 겸손하기로 정평이 났으나 안타깝게도 뇌졸중으로 쓰러져 6개월간 치료를 받다 귀국한 비운의 총영사로 기록됐다. 민형기 13대 총영사 이후 1999년 9월 부임한 김명배 총영사 시절 LA 총영사관은 동포사회와 소통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김 총영사는 당시 도산 동상 건립사업과 남가주 한국학원 재정난 타개를 위해 본인이 직접 전면에서 나서 한인 유지들을 일일이 만나 지원을 얻어냈으며 강력사건으로 한인 피해자가 발생하면 한인회장 등과 함께 유가족을 방문, 위로하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이 때문에 나중에는 한인회장이 유사상황이 발생하면 총영사가 자신을 찾기 전에 아예 먼저 유가족을 찾아가는 모습이 벌어지기도 했다.
■밀레니엄 시대
밀레니엄 시대인 2000년 들어 LA 총영사관은 한류와 한인들의 주류사회 진출에 맞춰 측면에서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는 등 공관의 역할과 위상도 급격히 변했다. 이윤복 16대 총영사(2003년 6월~2006년 3월) 당시 공관 서비스 업무가 강화되고 한류 확산을 위한 초석이 마련됐다. 2004년에는 현 LA 총영사관 건물 옥상에 설치돼 있는 대형 빌보드를 이용해 한국 홍보를 위한 대형 이미지를 처음으로 띄웠으며 미국 내 한국어 교육 진흥을 위한 정규 중ㆍ고교 내 한국어반 증설도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2006년 4월 17대 총영사로 부임한 최병효 총영사 재임기간에도 LA 총영사관에 한국 검사가 법무부 주재관으로 파견되고 불법체류자들을 위한 영사관 ID가 도입되는 등 민원 서비스가 강화됐다.
최 총영사 재임시절에는 2007년 LA 총영사관 부지를 포함해 4에이커에 이르는 윌셔-6가, 버몬트-뉴햄프셔 구간에 공관, 코리아 문화센터, 한미박물관, 대규모 녹지공간을 조성하는 대규모 경제개발 프로젝트인 ‘수퍼블락’ 지역 재개발 사업을 위해 LA 시정부와 양해각서(MOU)까지 체결했으나 예산확보 실패로 인해 결국 무산됐다.
■재외선거 시대 개막
LA 총영사관의 66년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공관장 인사는 18대 김재수 총영사일 것이다. 오렌지카운티에서 변호사로 활동해 온 김재수 전 총영사는 지난 2008년 4월 외교부 춘계 공관장 인사에서 18대 LA 총영사로 내정됐다. 당시 미주 한인이 해당 관할 총영사에 임명되기는 헌정 사상 처음이었다. 특히 김 전 총영사는 그 이전부터 이명박 대선후보 캠프에서 합류해,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클린정치위원회 ‘BBK 사건’ LA 대책팀장을 맡아 BBK 사건의 파장을 최소화하는데 공을 세우면서 그의 총영사 임명이 ‘보은인사’라는 논란이 임기 내내 끊이지 않았다.
김재수 총영사는 현지 출신답게 재임기간에 동포사회의 모든 행사를 일일이 살피는 등 커뮤니티 현안 챙기기에 주력을 다했으며 연말 어려운 이웃들을 돕기 위한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 그리고 미 교도소에 수감된 한인 재소자 보호를 위한 전용 상담전화 설치 등 다양한 행보를 펼쳤으나 외교적인 성과와 역량은 다소 미흡하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이후 2011년 3월 정통 외교관 출신인 신연성 총영사가 부임하며 재외국민 권익신장과 공공외교 행보에 본격적으로 나섰고, 재외선거 시대의 첫 공관장으로 부임한 신연성 총영사는 부임과 함께 민원인들의 편의증가와 공공외교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또 한국의 공직선거법 개정에 따라 도입된 헌정 사상 최초의 재외국민 선거가 신 총영사 재임시기이던 2012년 3월 LA 총영사관에서 역사적인 첫 투표가 이뤄지기도 했다.
당시 총영사관에는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와 제18대 대통령 재외선거가 실시돼 남가주 지역 한인 재외유권자들이 영사관을 찾아 줄을 이어 한국 투표권을 행사하는 진풍경이 이뤄졌다.
■총영사관의 역할과 위상 진화 필요
LA 총영사관은 민원서비스 향상을 위해 민원실장직이 신설되고 대기자를 위한 번호표 도입, 콜센터 신설 등 업무가 좀 더 세분화 되고 전문성을 띠게 됐다. 또한 2012년부터는 가족관계 증명서와 재외국민 공인 인증서가 차례로 발급이 시작되는 등 한국 민원서류 발급이 빨라졌으며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 18대 대통령 재외선거가 헌정 사상 처음으로 LA 총영사관을 비롯한 전 세계 재외공관에서 실시됐고, 한미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되는 등 총영사관의 역할과 기능은 더욱 확대됐다.
LA 총영사관은 앞으로 미국 내 최대 재외공관의 하나로서 초고속 인터넷 확산과 글로벌화 속에 날로 복잡다단해지고 있는 한인들의 다양한 민원 및 행정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새로운 서비스 마인드와 시스템을 갖출 것이 요구되고 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