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에 개봉된 영화 중에 ‘라이프 오브 파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스페인 태생의 캐나다 작가 얀 마텔이 쓴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인데 ‘브로큰백 마운틴’ ‘색계’ 등을 연출했던 이 안 감독이 원작의 놀라운 상상력과 흡인력 있는 스토리를 그대로 살려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형상화시킨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파이는 바다에서 조난을 당해 뱅골 호랑이인 ‘리처드 파커’와 함께 27일 동안 표류하게 된다. 그는 망망대해의 악조건 뿐 아니라, 배에 함께 타고 있는 맹수로부터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밤낮으로 사투를 벌여야 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구조된 후 리처드 파커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죽었을 것이라 회고한다.
가끔 생활 속에서 이 대목을 떠올릴 때가 있다. 돌이켜 보면 내 곁에는 늘 ‘호랑이’가 있었다. 집안에 이런저런 우환이 있을 때뿐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 별다른 사건이 없는 평온한 일상에서도 ‘호랑이’는 존재했다.
아이가 사춘기 무렵 한창 내 속을 썩이던 시절에는 “이 아이만 속을 안 썩이면 내가 다른 무슨 걱정이 있겠나”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아이 걱정을 한시름 놓게 되자 또 상황이 달라졌다. 그토록 바라던 “아무 걱정 없는 안온한 일상”이 시간이 지나면서 “지겹고 권태로운 일상”이 되어 버린 탓이었다.
매일 아침 똑 같은 시간에 일어나 허둥지둥 출근을 하고, 정오에 점심을 먹고 5시에 퇴근을 하여 돌아와 다시 저녁을 먹고, TV를 시청하다 잠자리에 들고, 다음날 똑 같은 일과를 다시 반복하고 …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은 “고맙고 감사한 일터”에서 “한심하고 따분한 일터”가 되었으며, 서울에서 잘 나가는 동창들의 소식도 김을 빼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생김새가 다른 호랑이였다.
오래 전 어떤 글에서 ‘지랄 총량의 법칙’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그 글에 의하면 사람은 모두 인생을 살아가며 일정량의 ‘지랄’을 떨게 되어있는데, 인생 초반에 이를 다 떨어버린 사람은 후반부에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으니 (예를 들어 자녀 문제 때문에 속 썩는 사람들은)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글을 읽을 당시 우스우면서도 그럴 듯한 말이라 생각되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여기에 ‘시련’을 대입해도 괜찮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어떤 인생이든 행복하기만한 인생은 없으며, 누구에게나 시련은 어떤 형태로든지 찾아들게 마련 아니겠는가.
너 나 없이 ‘시련 총량의 법칙’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삶에서 시련이 닥칠 때마다 ‘내 곁의 호랑이’를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당장 곁에 있는 이 호랑이만 없으면 내 인생이 행복해질 것 같지만, 막상 그가 없어지면 이번에는 다른 호랑이가 나타난다.
“내 인생에는 어찌 이리 호랑이가 끊이질 않는가” 하고 분노하고 자기연민에 빠지기 보다는 차라리 내 곁의 호랑이를 길들이고 끌어안으려 노력할 때 견디기가 훨씬 쉬워진다.
그리고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이 마냥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제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세월의 연륜을 거치지 않고는 ‘호랑이’를 길들이는 방법을 터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목사님은 행복이란 시련의 부재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련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깨닫게 되는 삶의 태도라고 했다.
‘호랑이’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대신, 그를 인생의 동반자로 받아들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삶의 여정인가보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