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선<수필가>
소리 없이 내리는 눈에도 사연이 다 있는 듯하다. 허공을 빙그르 돌다가 기울어진 담장에 올라앉는가 하면 까마귀 목 놓아 울다간 늙은 소나무위에 뭉텅이로 엎어지는 눈도 있다 앙상한 가지 위에 화사한 눈꽃으로 피었다가 한줌 따스한 햇살이 파고들면 속절없이 녹아내려 이내 영롱한 얼음 꽃이 되어 버린다.
눈 내리는 날이면 왠지 기분이 좋아지고 그 눈길 따라 저편에 반가운 소식이 곧 전해 올 것만 같은 막연한 설렘에 젖어든다 추억으로도 다가오고 아픈 기억으로도 찾아오는 하얗게 눈 내리는 밤이 몇 일째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족이 이민 오던 그 해도 이맘때 겨울이었다. 도회지가 아닌 한적한 작은 마을에 둥지를 틀고 단촐한 세 식구의 미래도 눈 폭풍과 함께 시작되었다. 일곱 살 배기 아들은 검은 쓰레기봉지를 썰매삼아 솜이불 같이 두터운 눈 위에서 온 몸을 굴리며 낯선 환경을 터득해 나갔다.
일 년이 지날 때 쯤 아들은 영어로 잠꼬대를 했고 그렇게 크고 작은 변화를 거치면서 성년이 된 아들은 결혼하고 벌써 세 번째 겨울을 보내고 있다. 잠 못 이루고 문지방을 드나드는 이 밤엔 눈 속에 묻힌 지나온 발자국이 연민으로 되돌아온다.
애정을 끓어 안고 살아온 세월만큼 보답이 훨씬 작음이 섭섭해 질 때도 있지만 한 오라기 따뜻한 바람에게도 미소를 건 낼 수 있는 겸손을 시린 인생의 경험을 통과하며 얻을 수 있었으니 이 혹독한 겨울 눈보라도 때가되면 노오란 데이지 꽃으로 피어오르겠지 추억도 사연도 깊어지는 겨울 밤 올해는 추억이 아닌 기억으로 슬픈 겨울을 지나고 있다.
겨울이 막 시작되던 그날 속절없이 눈 내리던 그 밤에 그녀는 스스로 세상 짐을 내려놓았다 갸름하고 유난히 하얀 얼굴 웃음까지도 털털했던 그녀가 떠난지 석 달이 되어간다. 일터로 불쑥 찾아오면 말동무가 되어주고 그렇게 응대해준 나에게 과분하리만큼 고마움을 표현했다.
막 커피 한잔을 건네며 서로가 소소한 일들을 털다 보면 벽에 걸린 시계추는 영락없이 가속도가 붙었고,사무실에 가서 물 컵으로 다시 쓰겠노라고 빈 커피 잔을 들고 총총걸음으로 달아나던 그녀는 자기 분수보다 훨씬 더 알뜰했고 앞일만 계획하며 열심히 달려왔는데, 무엇이 그토록 스스로 감당하지 못 할 만큼 무거운 짐으로 그녀를 힘들게 했을까? 어쩌면 그녀는 잠깐 사는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 속에 발버둥치는 남은 자들에게 하고 싶은 한 마디를 눈 속에 새겨 넣고 떠났는지도 모른다.
사연을 묻고 떠나간 자리에 또 다른 사연이 겹겹이 쌓인다. 빨리 지루한 눈이 그치고 봄꽃이 만발하길 고대한다. 눈꽃도 얼음꽃도 아닌 웃음꽃이 아픈 기억의 자리에도 활짝 피어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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