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선(전 커네티컷한인회장)
산등성이를 타고 마을까지 내려온 가을은 점령군이 되어 작은 집을 온통 포위해 버렸다. 두어 차례 비가 지나가더니 어느새 한기가 이불속까지 파고 들어와 새벽잠을 깨우고 간다. 떠나갈 가을이 빈 나뭇가지 사이에 둥지처럼 품고 있던 상처를 내보이는 시간,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미명(未明)의 창을 마주하고 서니 상념이 꼬리를 문다.
누구나 저마다 언제 생겨났는지도 모르는 날카로운 상처 하나쯤은 품고 산다지만 나는 그동안 무의식에서 조차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그림자가 어두울 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림자의 존재가 없는 것이 아니듯, 상처조차도 지금의 나를 키우고 있게 만든 한 부분이었음을 깨닫는다.
어느 시인이 말한 가을은 떨어짐이 아니라 잔잔한 물러남이고, 성장이 아니라 성수기였다. 그의 말을 빌어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를 향하는 열림이라면 무엇을 위해 지금의 나를 열어 두어야 하는 걸까. 하루가 다르게 나무가 잎을 내리고 숲이 비어가는 것을 보며, 자연은 제각기 다른 것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배운다.
가을은 두 가지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은 계절이다. 하여 올 가을에는 마치 영화감독이나 작가가 되어 살아보지 않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또박또박 적어보고 싶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내가 살아왔던 방식대로 살아가겠지만, 자연의 성장과 소멸을 보면서 다음 삶은 쫓겨 가는 삶이 아니라 비록 하잘것없는 것일지라도 내가 마주한 삶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삶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평생을 추구했던 꿈은 약속한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았고, 어느덧 그 시간은 훌쩍 내 인생을 지나가 버렸음을 안다. 그리고 언젠가 뜻하지 않은 시간에 마감이라는 최후의 통첩이 나에게도 배달될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 윤동주 시인이 약관의 나이에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에서 시어로 풀어내던 그 가을에 마주서 있다. 사람들을 사랑했었는지, 열심히 살았었는지, 상처를 준적은 없었는지, 그리고 삶이 아름다웠었는지,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 홀로 묻고 그리고 홀로 대답한다. 더 늦기 전에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감사하자고…. 이런저런 상념들로 묵직해진 마음에 등불을 밝혀 아침을 맞으며, 끝으로 정경하님의 글로 이 가을을 품는다.
‘중략….. 당신도 누구 때문에 위안을 받기도하고 감사해 하겠지만 당신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웃으며 감사하며 힘든 나날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당신은 참 귀한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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