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이의 진돗개
한국인이 미국에 이민오면 호칭이 복잡해진다. 우리끼리는 한인, 또는 동포로 통한다. 본국 여행객들과 유학생들처럼 ‘코리안’이라고 잘라 말하기가 찜찜하다. 본국정부는 우리를 교포 또는 교민이라고 부른다. 외국에 사는 동포를 뜻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교민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우리끼리 말하는 ‘한인’은 ‘한(국계 미국)인,’ 곧 ‘코리안 아메리칸’이다.
워싱턴주의 시애틀, 스포켄, 타코마, 페더럴웨이를 비롯해 뉴욕, LA, 시카고 등 미국 각도시의 한인회 명칭도 거의 모두 ‘Korean’이 아닌 ‘Korean-American’으로 돼 있다. 동남아, 유럽, 호주, 중남미 등 타지역 대다수 국가의 한인회들이 단순히 한국인을 뜻하는 ‘Korean’으로 돼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코리안 아메리칸’은 바로 재미 한인들의 정체성이다.
미국인들도 우리를 ‘Korean-American’으로 부르는데 뉴앙스가 좀 다르다. 미국사회에 완전 동화하지 않은 이민그룹이라는 냄새를 풍긴다. 이민역사가 긴 중국인들을 차이니스 아메리칸으로 부르지 않는다. 일본인들도 대개 니세이(2세), 산세이(3세)로 통한다. 흑인을 ‘블랙’이 아닌 아프리칸-아메리칸으로 부르는 건 피부색의 인종차별을 피하기 위해서다.
호칭이 복잡해선지 한인들의 정체성도 오락가락한다. 독립투사였던 이민 선조들부터 스스로 코리안 아메리칸이 아닌 코리안을 자처했다. 그 후 110년이 흐르며 한인사회에서 연방의원도, 시장도, 주의원도, 시의원도, 특히 대학총장들도 배출됐지만 대부분의 이민1세들은 주류사회에 도전하는 코리안 아메리칸이 아니라 본국을 바라보는 코리안으로 남아 있다.
지난 8일 ‘해외 한민족 대표자협의회’의 남문기회장(전 LA 한인회장)이 시애틀에 와서 지역의 전‧현직 한인회장들과 회동했다. 그는 미주 한인사회 대표를 본국 국회에 꼭 진출시켜야 한다며, 우선 본국 정부기관에 남을 모함하는 투서부터 삼가자고 강조했단다. ‘한인사회를 잘살게 하기 위한 지도자의 역할’이었던 그날 모임의 주제와 너무 동떨어진 얘기다.
한인단체장 12명이 페더럴웨이에서 남회장과 회동하고 있던 그 시간, 시애틀에선 신디 류 주 하원의원 3선 도전 킥오프 행사가 열렸다. 참석자 100여명 가운데 한인은 ‘당연히’ 10여명뿐이었다. 같은 이민1세이면서 코리안을 고집하는 사회단체장들과 코리안 아메리칸의 기수룰 표방하는 여류정치인의 두 행사에서 한인 정체성의 양극상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보다 사흘 전인 5일 한국문인협회(워싱턴 지부) 출판기념회에서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다. 그날 협회는 본국 재외동포교육재단이 주최한 올해 해외동포 글짓기대회에서 초등부 전 세계 최우수상을 받은 노지영을 ‘미래 작가’로 초청했다. 미국에서 태어난 지영(12)이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유창한 모국어 발음으로 수상작 ‘미국에 사는 진돗개’를 낭독했다.
린우드 소재 느티나무 한글학교 7학년인 지영이는 “(한국토종) 진돗개 두 마리가 미국으로 와서 새끼를 낳으면 그 애기 진돗개는 미국 개일까요?”라고 묻고는 엄마가 자기에게 맨 날 “너는 100% 한국사람이고, 100% 미국사람이야”라고 말한다고 썼다. 지영이는 “한 사람이 어떻게 200%가 돼? 엄마 눈엔 내가 두 사람으로 보여?”라고 투정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지영이는 이제 엄마 말을 이해한다고 썼다. 에디슨이 ‘1+1=1’이라고 했듯이 물 한 컵에 또 한 컵을 부으면 넘쳐흐를지언정 물은 한 컵만 남는다며, 마찬가지로 “1 Korean+1 American=1 Korean-American”인 것으로 믿으며, 누가 나의 정체성을 물으면 ‘나는 노지영입니다. 그리고 나는 100% 코리안 아메리칸입니다’라고 대답하겠다“고 갈파했다.
낭독이 끝난 뒤 지영이에게 달려갔다. 어머니로부터 “꼭 하버드에 가라”는 압력을 받는다는 그녀에게 “하버드에 가더라도 의사나 변호사보다 작가가 되라”고 격려했다. 시인도, 소설가도 좋고 기자 같은 저널리스트도 좋다고 했다. 어차피 후세들이 1세들에게서 정체성을 본받는 건 연목구어다. 그들에겐 지영이처럼 정체성이 확립된 또래 롤모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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