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사나이
몇일 전 시애틀 매리너스와 LA 에인젤스간의 경기가 벌어지기 앞서 웬 80대 노인이 세이프코 필드 마운드에 올라 세레머니 시구를 했다. 그런데, 고작 0.5피트(6인치) 높이의 피처 마운드에 우뚝 선 이 노인에게 관중은 우레 같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는 꼭 50년 전 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29,028피트의 에베레스트 정상에 우뚝 선 짐 휘태커(84)였다.
그가 이날 야구장에서 받은 박수는 반세기 전 세계최고봉에 성조기를 꽂고 내려왔던 때와 비교가 안 된다. 고향 시애틀에서 색종이테이프 환영 퍼레이드가 벌어졌고 케네디 대통령은 그를 위해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파티를 열었다. 휘태커는 한 해전 역시 미국최초로 지구궤도를 3바퀴 돌고 내려온 우주인 존 글렌과 함께 미국인들의 당대 최고영웅이었다.
휘태커의 에베레스트 등정 50주년을 맞은 지난 주 많은 일화가 공개됐다. 그는 본디 고소공포증 소유자다. 고층빌딩에만 올라가도 어질어질해 한다. 등산장비 회사 REI에 첫 풀타임 직원으로 들어가 최고경영자(CEO)가 됐다. GPS 메이커인 마젤란 내비게이션 사의 이사장이다. 한국전 때는 미군 산악 전투부대원들에게 고산등반을 훈련시킨 교관이었다.
휘태커는 1965년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을 안내해 ‘케네디 산’ 초등에 성공했다. 유콘에 있는 이 1,4000피트 고봉은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후 캐나다 정부가 그의 이름을 따 명명했다. 이 산의 첫 정복자가 된 케네디 의원은 눈 덮인 정상에 형의 초상이 새겨진 반 달러짜리 동전을 묻었다. 3년 뒤 대통령에 출마한 케네디 의원도 LA에서 암살당했다.
시애틀에서 쌍둥이로 태어난 휘태커는 14살 때 보이스카웃 대원들과 함께 6,000피트급 산에 올랐다가 너무나 두려워 “무사히 내려가기만 하면 다시는 산에 안 오르겠다”고 맹세하며 기도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그는 웨스트 시애틀고교와 시애틀대학에 다니면서 산 사나이가 됐고, 졸업 후 약 4년간 쌍둥이 루와 함께 전문 등산가이드가 돼 벌어먹고 살았다.
휘태커는 1960년 미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선발돼 2년여간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벽돌과 돌멩이가 든 배낭을 메고 레이니어산을 수차례 올랐고, 한 겨울에 호수에 뛰어들어 추위를 참으며 에베레스트의 극한상황에 대비했다. 덕분에 그는 1963년 5월1일 오후 1시경 셰르파 나왕 곰부와 함께 강풍이 휘몰아치는 영하 35도의 정상에 성조기를 꽂을 수 있었다.
당시 원정대는 셰르파 32명과 짐꾼 909명을 고용해 카트만두에서 베이스캠프까지 185마일을 강행군하며 27톤의 장비와 식량을 운반했다. 암벽과 빙하를 오르며 고산병에 시달렸고, 눈보라 속에 로프를 가설하며 길을 만들다가 대원 한명이 크레파스에 추락해 사망했다. 정상 바로 아래서 셰르파들이 산소통을 몽땅 들고 내빼는 황당한 사건까지 벌어졌다.
휘태커는 강풍 때문에 정상에 겨우 20분간 머물고 하산하다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 정상에서 무너진 바위돌기가 천길 아래로 떨어져 하마터면 휩쓸릴 뻔 했다. 그 와중에 휘태커가 용변을 보기 위해 바지를 내리고 앉으면서 카메라가 80피트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곰부가 찍은 ‘정상정복 인증샷’이 들어 있는 그 카메라를 두 사람은 고생고생하며 수거했다.
휘태커는 10년 앞서 에버레스트를 사상 처음 등정한 뉴질랜드의 에드먼드 힐라리 경에 이어 10번째, 곰부는 11번째 정복자가 됐다. 곰부는 힐라리의 셰르파였던 텐징 노르게이의 조카이다. 그후 지난 50년간 약 6,200명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섰다. 휘태커도 여러 번 다시 올랐고, 그의 아들 리프는 작년 5월 생애 두 번째로 에베레스트 정복에 성공했다.
요즘 에베레스트 등반가들은 비행기를 타고 베이스캠프에 45분만에 도착한다. 일부 안내회사들이 경험 없는 등반가들도 마구잡이로 모집해 인명사고가 잇따른다. 휘태커는 에베레스트에서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상식과 이론과 하이텍 장비가 아니라 훈련과 경험과 정신력이라고 강조한다. 에베레스트 등반만이 아닌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통하는 진리다.
윤여춘(고문) 5-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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