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운 첫 한인약국 운영한 약사 은행 이사장도‘아름다운 퇴장’ 난은 딸, 판소리는 아들 같은 존재 수십년 째 변함없는 사랑에 빠져 소외이웃 돕고 커뮤니티 봉사 의미있는 삶 살고 싶어
박창규 전 한미은행 이사장
그는 항상‘아름다운 퇴장’을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한인1세대 약사로서 타운 최초로 약국을 운영했던 일을 그만둘 때도 그랬고 누구나 놓기 싫어하는 은행 이사직을 떠날 때도 그랬다. 한인건강정보센터 이사장을 맡아 3년을 봉사하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내 몫은 여기까지’라며 자리를 넘기고 홀연히 떠났다.“ 남들이 죽을 때까지 하고 싶어 하는 일들을 어떻게 그렇게 미련 없이 그만 둘 수 있느냐”고 묻자 “하고 싶은 일이 많아서…”라고 대답했다. 박창규(72) 전 한미은행 이사장 이야기다.
그는 이같은 많은 일을 하면서도 지난 40년간 난(蘭)에 빠져 있다. 그는‘난이야말로 내 인생에 정직과 겸손을 가르쳐준 스승과 같은 존재’라며 난을 돌보는 일이 생활의 전부가 됐다고 말했다. 긴 세월을 난과 함께 하다 보니 욕심도 성냄도 없어진다고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난처럼 온화한 모습이다. 그는 또 지난20년을 한국의 소리‘창’(唱)에 빠졌다. 현재 한국 전통음악진흥회 이사장을 맡아 한인사회에‘창’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심청가, 춘향가 등 유명한 판소리를 부른다.그는“지금 생각해 보면 약사로 일하면서 어렵고 소외받는 이웃들의 건강을 챙겨줄 때가 가장 보람 있었던 것을 생각할 때 역시 나의 천직은 약사”라며“ 앞으로 기회가 되면 이와 관련한 커뮤니티 봉사활동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박 이사장으로부터 그의 삶과 열정을 들어봤다. <박흥률 기자>
-미국에 올 때부터 약사였습니까.
▲서울대 약대를 졸업하고 서울시청 보건국공무원 생활을 시작했지요. 1971년에 미국에와 USC에서 약학대를 다시 다녀 서른세 살에약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75년에 올림픽가에 ‘올림피아’ 약국을 개업했어요. 아마 첫한인운영 약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웨스턴 약국(1979년), 세라노 약국(1981년)을 잇달아 개업했습니다.
-한인 약국이 없었으니 돈을 많이 버셨겠어요.
▲고객이 줄을 서는 바람에 점심을 먹을 시간이 없어서 빵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일을 할정도였지요. 옆에 식당이 있었는데 식당 아주머니가 밥 먹으러 오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를 많이 했습니다. 약국 개업한지 2년만에 우드랜드힐스에 아담하고 좋은 집을 마련했습니다.
-약국은 언제까지 운영했습니까.
▲1998년까지 웨스턴, 세라노 약국을 직접운영했고 올림피아 약국을 같은 해에 아우에게 인계했죠. 2008년까지 세라노 약국을 위탁경영했으니까 약국을 33년 동안 운영한 셈이죠. 평생을 약사로 일했습니다.
-은행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1981년인가, 정원훈 전 가주외환은행장이 약국을 방문해서 순수한 한인 자본으로 은행을 한 번 설립해 보자고 말씀하시더군요. 25만달러를 투자했습니다. 한미은행이 설립됐고 초대행장에 정원훈 행장, 창립 이사로 조지 최,윤원로, 이창, 안이준, 안성주, 존 안, 안응균 이사 등이 같이 참여했습니다. 그때는 매주 이사회를 했는데 정 행장님의 은행 장사는 ‘손톱끝 남는 장사’라며 경비절약으로 이익을 남기자고 했던 말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이사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어떻게 이사직을 그만 두었나요.
▲2002년에 이사장을 맡았습니다. 나름대로열심히 했지만 한인 커뮤니티에 장학금 출연을 통한 커뮤니티의 이익환원을 약속했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이행하지 못한 것이 아직도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승승장구하던 한미은행이 2008년 금융위기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서면서 책임을 느끼고 이사 4명이 자진사퇴할 때 제가 앞장서 명퇴의 용단을 내렸습니다.“ 이제 물러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미련은 없습니다. 은행환경도 많이 바뀌었고 결국 세대교체가 필요할 때라고 봐야지요”
-은행 이사로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특별히 아쉬운 점은 없습니다. 굳이 한 마디 한다면‘ Nose In, Hand Out’이라는 말이 있어요. 즉 냄새는 맡되 관여하지 말라는 은행 경영의 원칙이죠. 한미 이사회가 경영을 맡고 있지만 참견하지 말라는 원칙을 지키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지금은 이사진과 경영진이 잘조화를 이루는 것을 보니 마음이 놓입니다.
-난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1970년대 중반 우드랜드힐스 집으로 이사했을 때 한 지인이 선물한 난을 키운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지금 350여종의 난을 키우고 있습니다. 취미로 시작한 것이 이제는 풀타임 잡이 되어버렸습니다.
-박 이사장에게 난을 정의한다면.
▲난은 저의 스승입니다. 난의 정직함, 고고함에 매혹 당했습니다. 난의 정취를 늘 느끼면서 난처럼 살기를 원했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부끄러움 없기를 바라고 가치 있는 일을 하면서 열정을 태우다가 멋있게 죽고 싶은 것이 소망입니다. 난으로부터 정직과 겸손을 배웠죠.
-난을 키우는 게 힘든 일도 많을 텐데.
▲난은 조금만 방심하거나 한 눈 팔면 금방상합니다. 햇빛이 너무 많이 들어도 안 되고 습도가 너무 높아도 안 됩니다. 적당한 수분과 온도, 공기, 비료 등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것이 없습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과 정성입니다.
-창을 시작한 계기는.
▲원래 음악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서울 고등학교 때는 밴드부에서 활동했습니다. 클라리넷 등을 연주했고 기독교 방송국 합창단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임권택 감독의‘서편제’라는 영화에서 애비가 딸에게 “한이없으면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는 뵙이여”라는대사가 나오는데 소리는 한을 풀어내는 통로입니다. 어릴 때부터 판소리를 좋아해서 강옥주의 회심곡, 이은관의 배뱅이굿을 듣고 또 들었어요. 두곡의 LP 판을 이민 올 때도 챙겨올 정도로 제 핏속에는 소리에 대한 감흥이 살아서꿈틀거리는 것을 느낍니다. 판소리는 뱃속의 힘
을 힘껏 자아내어 목을 통해서 뱉어내는 것인데 마치 한 표를 호소하며 젖 먹은 힘까지 토해내는 정치가의 연설 같아요. 이렇게 몇 번을하다 보면 허기가 돌고, 머리가 비워지며 무욕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는 데, 힘 다할 때까지하다보면 자아도취·무아지경에 이르게 되죠.
-난과 창 중 하나를 고른다면.
▲난은 딸이요, 창은 아들 같은 존재입니다.난은 하루 종일 같이 있는 가족이며 창은 평생을 따라다닌 피붙이 같은 존재입니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열정입니다. 어려운 일에도 열정을 쏟아 부으면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많은 사람들이 열정을 욕심으로 착각하는 것같아요. 무리한 욕심을 내지 말고 하는 일에 열정을 다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인간은 혼자 와서, 혼자 맨손으로 죽는 것은 확실한데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는지는 불확실하다”는 목사님의 설교가 뇌리 속에 남아있습니다. 가치 있는 일을 하면서 열정적으로마지막 순간까지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은 것이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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