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민층에 속한 무보험 환자들은 전문의를 보기 힘들다. 커뮤니티 보건소를 통해 예약을 할 경우 피부과나 신경과 는 1년 이상을 기다려야 하고 심장 전문의나 안과 의사를 만나려면 최고 18개월이 걸린다.
시야가 흐릿해지는 증상은 지난해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로이 로렌스(49)는 애써 불안한 마음을 억눌렀다. 어차피 보험이 없으니 전문의를 찾아갈 형편도 못됐다. 그가 의사를 찾아가기로 결심한 것은 건설현장의 사다리를 오르다 발을 헛디뎌 낙상을 입은 후였다. 사다리의 계단이 보이지 않을 정도라면 조만간 시력을 완전히 상실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그의 행동을 부추겼다.
의사 만나려고 커뮤니티 보건소 찾아가 예약하니
피부과·신경과는 1년, 심장·안과는 18개월 대기해야
오바마 의료개혁법 시행되면 상황 더 악화될 수도
로렌스가 찾아간 곳은 사우스LA 커뮤니티 보건소였다. 보험과 차, 현금과 영주권이 없는 그가 의사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카운티 보건소였다. 거기서 그는 당뇨병과 백내장 진단을 받았다.
보건소 직원은 그가 눈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지난해 초 카운티 병원 안과진료 대기자 명단에 그의 이름을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로렌스는 수술은 고사하고 의사의 얼굴조차 본 적이 없다.
그동안 자메이카 태생의 ‘불법체류자’인 로렌스의 시력은 ‘법적 맹인’으로 간주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연방 정부는 로렌스를 치료한 T.H.E 클리닉을 비롯, 커뮤니티 보건소들에 매년 수십억달러를 지원한다. 무보험자들이 의료경비가 호되게 비싼 병원 응급실로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한 방책이다. 그러나 보건소에 의존하는 저소득층 환자들은 전문의를 보기 힘들어 병을 키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미 의과대학협회(AAMC) 자료에 따르면 2020년까지 미국은 외과의와 전문의 4만6,000명을 추가로 필요로 한다. 2010년에 비해 거의 열배가 늘어난 규모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추진한 의료보험 개혁으로 문제가 악화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의료개혁법으로 새로 보험을 갖게 된 기존 무보험자들이 그동안 받지 못했던 전문적인 치료를 받으려 한꺼번에 몰리면서 상황이 더욱 심각해 질 것이라는 관측이다.
캘리포니아의 무보험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의료개혁법에 따라 앞으로 연방 정부가 제공하는 재원을 바탕으로 주정부가 저소득층을 위해 운영하는 메디칼(Medi-Cal) 보험에 가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민간 전문의들이 의료보험 수가가 낮은 메디칼 등 메이케이드 환자를 꺼린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최근 가주 항소법원은 메디칼 보험수가를 10% 추가 삭감키로 한 주정부의 결정에 합법성을 부여해 주었다. 이렇게 되면 메디칼 환자를 받는 전문의를 찾기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의료개혁법은 일반의 부족사태를 줄이기 위한 방안을 포함하고 있지만 빈민층 환자들이 전문의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높일 뾰족한 묘수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LA 카운티는 무보험 환자들의 수가 워낙 많기 때문에 공공 의료시스템이 만성적인 마비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문의를 만나려는 무보험 환자들의 예약 폭주로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지 않고서는 신경 전문의나 심장 전문의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다.
이 때문에 지역 보건소들은 치명적인 질환은 아니지만 시급한 치료를 요구하는 환자들을 가급적 빨리 전문의에게 보내기 위해 공식적인 추천 절차를 우회하기도 한다.
보건소의 1차적인 임무는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의 상태가 아닌 환자들이 병원 응급실로 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건소 직원들은 종종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어긴 채 전문적 치료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을 병원 응급실로 보낸다. 워낙 대기기간이 길다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보건소의 추천을 받아 피부과 전문의나 신경 전문의와 예약을 하면 보통 1년을 기다려야 한다. 심장병 전문의나 안과 의사를 만나려면 최고 18개월이 걸린다.
T.H.E. 클리닉의 전문의 추천 담당직원인 디 레온은 하루 종일 창문도 없는 구석방 사무실에 앉아 환자들의 예약을 조금이라도 앞당겨 주기 위해 주정부 관계자들과 입씨름을 벌인다. 거기다 언제 의사를 볼 수 있는지 묻는 대기 환자들의 전화까지 받으려니 눈코 뜰 사이가 없다.
그녀는 늘 1,000건 이상의 미처리 추천서에 묻혀 지낸다. 아무리 기를 써도 쏟아지는 전문의 예약요청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위장내과 전문의의 진찰과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고 싶어 지난해 4월부터 대기해 온 후아나 바레라(45)는 최근 레온에게 전화를 걸어 위장 통증을 호소했다. 간헐적으로 피가 섞인 혈변을 본다는 그녀는 “암이 아닌지 정말 걱정이 된다”
며 대기기간을 줄여달라고 하소연했다.
레온은 통증이 있다는 사실을 첨부해 예약신청을 다시 하면 대기시간을 조금 단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암을 의심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됐으니 의사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판단이다. 환자 입장에서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헷갈리는 상황이다.
기다림에 지친 로렌스도 안과 의사를 만나기 전에 시력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두려움에 지난해 11월 직접 병원 응급실을 찾아갔다.
친구의 도움으로 버스를 세 번 갈아탄 끝에 LA카운티-USC 메디칼 센터 응급실에 도착한 그는 거기서 다시 다섯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했지만 보람은 있었다. 그의 상태를 살핀 응급실 의사는 다음날 안과 전문의와의 예약을 잡아주었다.
로렌스가 응급실을 찾기로 결심한 것은 지난 10월 중순 T.H.E. 클리닉의 레온으로부터 “안과 전문의를 만나려면 앞으로 1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앓느니 죽는다”는 말은 아마도 이런 경우를 일컫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다음날 다시 USC 메디칼 센터를 찾은 로렌스는 안과 전문의 사이먼 바바베이기의 진찰을 받을 수 있었다.
바바베이기 박사는 당뇨병과 고혈압, 높은 콜레스테롤이 로렌스의 백내장을 초래한 원인인 것 같다며 그가 받아야 할 수술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한 번에 한 쪽씩 두 차례에 걸쳐 눈 수술을 받고 나면 시력이 회복될 것”이라는 의사에 말에 로렌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부터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듯싶었다. 그러나 수술준비를 위한 검사를 받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그의 심장검사에서 이상증상이 발견된 것.
이 때문에 로렌스는 먼저 카운티 심장병 전문의의 진찰을 받은 뒤 그 결과를 갖고 바바베이기 박사를 찾아가 수술 날짜를 잡을 수밖에 없게 됐다.
지금 그는 카운티 보건소 예약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채 심장병 전문의를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심장병 전문의를 보려면 최고 18개월을 목빠지게 기다려야 한다.
로렌스는“ 눈이 점점 나빠지고 있는데, 이젠 심장까지 문제를 일으켰다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아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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