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선 투표 날 TV에 단골로 나오는 뉴스가 있다. 통통배를 타고 먼 육지 투표소에 찾아온 섬사람들, 아침 일찍 투표소에 삼삼오오 몰려온 등산객과 낚시꾼들, 손자가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온 할아버지, 허니문 여행을 위해 비행장에 가기 전에 투표소부터 찾은 신혼부부 등 한 표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한 유권자들을 소개하는 프로다.
신통하게도 이번 18대 대선 재외국민투표에서도 비슷한 모습들이 연출됐다. 시애틀총영사관 투표소에 이웃 오리건과 아이다호 유권자들이 찾아온 건 약과다. 대만의 한 유권자는 투표소가 있는 홍콩으로 날아가 투표했다. 독일에서 뛰고 있는 축구선수 차두리도 연고지인 뒤셀도르프에서 본까지 달려가 난생 처음 투표했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이들도 약과다. 라스베이거스의 한 노인은 투표에 나흘을 투자했다. 버스를 타고 LA총영사관 투표소에 찾아왔지만 영주권을 두고와 신분확인이 안됐다. 버스 편이 없어 모텔에서 묵은 노인은 다음 날 귀가했다가 이튿날 다시 버스를 타고 LA에 와 투표한 뒤 나흘째 날 돌아갔다. 두차례 왕복(1,200마일) 여비와 이틀간 숙박비도 수월찮았다고 했다.
국내외 언론매체들도 이번 재외국민투표 열기가 “뜨거웠다”며 흥분했다. LA의 한 한인신문은 “우리들의 힘 제대로 보여줬다”는 통단제목 기사를 1면에 실었고 본국의 한 일간지도 “재외국민투표 높은 호응…(재외선거) 시작하길 잘했다”는 사설을 게재했다. 선거당국도 71.2%의 투표율이 본국대선에 대한 재외국민의 높은 관심을 반영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투표율 71.2%는 산술이 서툰 내가 봐도 ‘눈 감고 아웅’ 식이다. 유권자 10명 중 7명 이상이 투표한 것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사실은 전체 재외국민 선거권자가 아닌 이번 대선투표 등록자의 71.2%가 투표했다. 총 선거권자(223만여 명)를 기준으로 하면 이번 투표율은 고작 7.09%이다. 100명중 7명만 참여한 형편없이 저조한 투표율이다.
한국 역사상 처음이었던 이번 대선 재외국민투표를 100명중 93명이 이웃 집 굿 보듯 했지만, 원래 재외국민선거는 본국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기간에 해외에 체재하는 본국 유권자들이 우선 대상이다. 실제로 이번 재외국민선거에서도 등록자 10명중 8명은 해외주재원•유학생•여행객 등 국외 부재자들이었고 해당국 영주권자들은 2명도 채 못 됐다.
지난 4월 총선의 재외선거 경비는 1표당 13만9,200원 꼴이었다. 국내의 1표당 5,900원에 비해 23배나 많다. 이번 대선도 국내 1표당 경비가 1만원 꼴인데 비해 재외선거 1표는 30만원 가까이 들어갔다는 계산이다. 전 세계에서 대선 투표에 참여한 순수 재외국민(영주권자) 수는 4만3,201명에 불과했는데 이들의 투표에 든 돈은 무려 265억원이었다.
고맙게도 본국정부가 고비용을 무릅쓰고 재외국민의 참정권을 존중해주지만 재외동포의 위상은 본국에서 오히려 더 떨어졌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외국 영주권자를 재외동포로 보느냐는 질문에 ‘그렇다’는 응답자가 2009년 71.3%에서 2011년엔 66%로 낮아졌다.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한인 2~3세는 재외동포로 볼 수 없다는 응답자도 59.6%나 됐다.
본국인들에게 선망과 질시의 대상이었던 미주한인들이 조롱과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한 건 오래된 일이다. 이미 1970년대 중반 한 신문사 특파원이 이민사회의 부정적인 면을 파헤친 르포 기사가 ‘코메리칸의 낮과 밤’이라는 책으로 출간됐고, 윤여정 주연으로 영화화됐다. 그동안 본국 TV 드라마에서도 재미동포는 사기꾼이나 백수건달로 묘사되기 일쑤였다.
이번 본국 대선투표에서 미국동포 등록률이 저조(10%)한 건 이상하지 않다. 지난달 미국 대선투표 등록률은 더 낮았다. 많은 1세 한인들이 미국정계에 진출할 2~3세 양성이 시급하다고 강조하면서도 본인들은 본국정계를 기웃거린다. 본국대선을 남의 집 굿 보듯 하는 게 잘하는 일은 아니지만 미국대선을 강 건너 불 보듯 하는 건 더 바람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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