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녀석이 의학계통의 연구에 참여한 모양이다. 학부에서 배운 엔지니어링을 의학에 접목시켜보는 일의 일부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무 경험이 적고 의학 연구라는 게 깊고 방대해선지 끙끙 앓고 있다.
나에게는 전혀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있는데,“엔지니어링을 모르는 아버지가 뭘 도와 줄 수 있겠느냐?”라는 눈치이다. 나도 실상은 연구에 대한 생각을 하면 식은땀이 흐른다. 신장내과 임상 펠로우를 하는 동안 임상실험은 그래도 할만 했었지만, 기초 학문의 세포연구는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다. 필수 수련 기간이었기에 억지로 했던 기억이 있다.
연구실 문 앞에 누군가가 이런 문구를 붙여 놓았었다. “이 문을 들어서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아마도 끈기를 강조했던 것이리라.
연구를 하려면 끈기도 중요하지만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가설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꽤 시간이 지난 이야기이지만 당시“칼슘을 많이 먹으면 신장결석이 잘 생긴다”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었다. 그래서 나와 신장내과 지도교수는 그렇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웠다.
그리고 신장결석이 잘 생기는 환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은 칼슘 알약과 칼슘이 많은 음식을 먹게 하고, 다른 그룹은 밀가루 약과 저 칼슘식을 하게 하였다. 2년 가까이 관찰한 결과 칼슘을 많이 먹은 사람들에게서 오히려 신장결석이 적게 발생하였다. 그 이유는 칼슘이 소장에서 신장결석 형성에 필요한 옥살산의 흡수를 줄여주기 때문에 신장결석이 시작되지 못한 것이었다.
고정관념에서 탈피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진 의학적인 발전은 수없이 많다. 그 중에서 한국 사람들의 위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헬리코박터(Helicobacter Pylori)라는 박테리아가 있다. 이는 위암의 빈도를 증가시키는 것으로 생각되며 항생제로 치료를 한다. 과거에 위장이 나쁘면 항생제를 먹지 말라고 한 고정관념과 상반되는 치료이다.
의학뿐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면에서 고정관념을 깨는 것의 중요함을 이번 여름에 더 느꼈다. 이번 여름 우리 부부는 남매를 데리고 한국에 가서 팔순의 장모님과 백세 되신 외할머님을 찾아뵈었다. 무척이나 반가워하시는 두 분께 우리는 한국식으로 큰절을 올렸다.
장모님은 사시면서 많은 고정관념을 깨뜨리신 분이다. 6.25 전쟁 후 밥을 굶어 가면서도, 그 당시 여자들이 잘 진학하지 않던 서울대 화공과를 졸업하셨다. 평생 열심히 사셔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지금도 사는 방식이 좀 남다르다. 버스를 타고 다니시고, 옷은 주로 남대문 시장에서 사신다.
그러면서도 내가 의료선교를 갈 때면 약품을 사라며 적지 않은 돈을 주시고 여러 선교사님들을 후원하신다. 또 많은 장학금으로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을 키우시는 이분은 장모님이기 이전에 내가 존경하는 분이시다.
서울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이제 사회의 중심인물들이 되어 있었다. 보기에 별로 잘 해낼 것 같지 않았던 친구들 중에서 꾸준히 노력해 자기의 길로 바로 가고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했던 나의 고정관념을 뉘우쳤다.
한 친구의 아들은 미국에서 지낼 때 우리 집에 종종 놀러 와서 무척 귀여워했었는데, 어느새 미국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 군대에 가있었다. 그런데 이 청년이 행정병으로 복무하면서 그 부대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병사 15명을 모아 놓고 검정고시 시험을 준비시켰단다. 이번에 14명이 합격되는 쾌거를 이루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속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군대에 가서 복무하는 일만도 벅찰 텐데, 별도로 시간을 만들어 동료들을 도와주었다니… 이렇게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젊은이를 보며 우리 사회에 희망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는 이 의과대학에 원서를 넣고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 이런 젊은이가 의사가 된다면 좋은 연구결과가 많이 나올 것이다. 나는 흥분되어 한마디 했다. “너 우리 사위 하자.”
김홍식 내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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