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선 <전 커네티컷 한인회장>
윤동주 문학사상 선양회가 주관한 윤동주 문학제에 다녀왔다. 올해에는 문학제 대상을 수상한 김용택 시인이 참석했다. 시인을 만나보고 싶었다. 그 여자네 집을 처음 읽었을때 세상살이의 무게로 무디어졌던 가슴이 뛰었었다. 나는 사십년의 세월을 거슬러서 교복을 입고 있었고, 오랜 세월에서도 선연히 떠오르는 설레임이 남아 있었다. 멀리서 바라봄으로써 하루가 시작되고, 하루가 끝나기 전에 또 멀리서 바라보아야 했던 그여자의 집…
그녀는 누이의 단짝 친구였다.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던 그녀는 대부분의 친구들이 인문계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 홀어머니를 도와야 한다며 여상으로 진학했다. 늘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그녀였기에 담임선생님은 물론 교장 선생님까지 나서서 인문계 고교로 진학하기를 강권했었지만 그녀의 굳은 결심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날 이후 누이와 그녀는 인문계와 실업계 학교로 나누어져 서로 다른 삶을 시작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길에서 생선 파는 일로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는 생선장수였다. 부지런한 그녀의 어머니가 몸져누웠을 때 그녀는 교복을 입은채로 어깨너머로 배운 생선을 팔곤 했다. 그녀의 옷에서는 비릿한 생선 냄새가 떠나지 않았으나 얼굴에는 늘 따뜻한 웃음이 남아 있었다. 길에서라도 우연히 마주치면 부끄러워하지 않고 먼저 환한 웃음을 보냈다. 누이는 대학을 진학했고 그녀는 원하던대로 한 은행에 입사 했다. 누이는 사랑을 기다리는 학생이었으나 그녀는 병든 어머니와 동생들을 책임져야하는 가장이었다.
누이가 결혼하던 때 그녀는 직장을 퇴사한 후 많지 않은 퇴직금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누이가 결혼을 한 후 몇 해가 지난 후 나도 결혼을 했다. 그날도 그녀는 예전과 변함없는 모습으로 누이 옆에서 환한 웃음으로 축하 인사를 건네었다. 그때의 모습이 나의 그녀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다.
나는 그 후에도 누이로부터 간간히 그녀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녀는 명문대 영문과에 입학하여 대학내내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넉넉치않은 살림살이는 여전히 그녀를 열악한 생활로 내몰았고. 대입을 준비하던 2년을 보태어 꼬박 6년을 고시원에서 갇혀 살게 했다. 그녀는 미국 유수의 대학으로 유학이 예정되어 있었다.
입학허가를 얻고 곧 꿈을 이루는 듯 보였으나 그동안 소화제와 진통제를 먹으며 달랬던 건강이 위암 말기로 밝혀졌다. 내 누이는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소식을 전했고 나 또한 안타까운 그녀의 꿈에 가슴이 먹먹해 짐을 느꼈다.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운집 …….
김용택 시인이 말한 그여자의 집에는 이렇게 내 젊은날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상념에 젖어 있다 주위를 돌아보니 대부분이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와 연배가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그들도 추억 속에 나와 같은 그 여자의 집을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젊은날에 그 여자의 집이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숨가쁘게 달려온 내 삶에도 한그루 나무가 자라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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