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는 것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나날에 무언가를 하고 있는 듯 하게 느끼게 하는 줄도 모르겠소. 나의 그림이 오직 ‘선의’로 받아들여지기 바라고, 내가 보냈던 크리스마스카드 ‘성 니콜라스의 밤’은 당신의 삶의 멋진 행해를 축원하는 의미였소. 난 30Kg이나 체중이 줄었다가 10Kg을 회복했소. 머리카락이 빠졌고 귀에선 윙윙 소리가 나오. 오른 쪽 눈은 잘 보이지 않고 흰 머리가 무척 늘었소. 병의 상태라 어쩔 수 없구려. 오늘은 그림을 그렸소. 말이 많은 것 같지만 당신은 원래 내가 말을 즐기지 않는 것을 잘 알고 있소.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있다면 알려주기 바라오. LA에선 무척 고마웠소. 친구를 통해 당신이 숲에서 기거하며 그림을 그린다고 들었소. 마침 잭슨 폴락의 영화에서 그가 벌판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아서인지 때로 난 당신이 동양인인지 미국인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소. 미국 벌판에 서 있으니 미국인이지 … 난 혼자 웃곤 하오.
나도 교토로 이사를 왔고 공원에 나가 엽서 사이즈의 스케치를 하기도 하오. 친구 말로는 당신이 나의 크리스마스카드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다들 바보 같은 카드 그림을 좋다고 하니 … 세상이 원래 그런 것 같소. 그래서 다른 작업을 보내오.
내 큰 딸의 이름이 우미(바다)인데 바다 그림의 연작<사진>과 글이 있는 이 소책자의 제목이오. 아마도, 당신이 글을 쓴다고 하니 이해할 수 있겠지만 항해자는 남자이고 바다는 여자를 의미하기도 하오.”
몇 년 전 친구인 일본인 화가 야수나리가 의천철부(衣川哲夫)라는 화가와 함께 LA에 왔었고 우린 조수아 트리 팍에서 캠핑했다. 별 밤의 사막이 의천철부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듯 큰 딸의 탄생 때 그린 ‘성 니콜라스의 밤’이라는 카드를 보내주었었다. 그가 간암으로 투병하다 겨우 생명을 회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며칠 전 그가 그린 한권의 책이 도착했다. 책의 제목은 ‘바다의 일’일 듯 한데 일본어로는 더 시적인 제목일 듯하다.
그가 원래 바다의 모든 상징적 의미와 이미지를 좋아 했을 듯싶어 쓰나미의 재앙을 기억하며 그의 바다 그림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 시사적일 듯싶지만 사경을 헤맨다던 병고의 소식과 함께 보는 그의 바다 그림은 자연의 거대한 힘(여성, 죽음, 재해)을 항해하는 한 인간의 내면이 마치 선시처럼 초연하나 거칠고 깊고 섬세한 필치가 바다처럼 포효하기도 하고 고요하기도 하여 사력을 다한 전 존재의 항해로 출렁인다.
좋은 그림은 그토록 애써 지키려드는 일상의 밸런스와 한계를 무너트리며 존재의 심연으로 뛰어들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게 하는 데, 사랑하는 딸 우미에게 바친 바다 그림 연작을 들여다보며 인간의식의 무한함에 잠시 넋을 잃는다.
단 한번 만났던 화가의 사랑, 절망, 슬픔과 힘이 얇고 귀한 책자 속에 담겨있다. 그가 건강을 회복하여 언젠가 교토의 벚꽃 흩날리는 거리를 함께 걸을 수 있기를 꿈꾸어 보지만 봄날은 속절없이 지나가고 있다.
시라기 보다는 그림의 제목인 다음의 문장들이 거칠고 아름다운 바다 그림에 적혀 있다.
바다는 크고 모든 항해자는
미지를 향한다
바다의 출렁임으로 모든 생물은
시간을 깨닫는다
바다는 폭풍이다
태풍은 바다를 노하게 하고
언제든 바다사람의 삶을
빼앗아 간다
바다는 때로 고요하다
항해자는 하늘을 바라본다
바다는 슬픔으로 흐른다
바다는 꿈의 고향으로 흐른다
바다의 색깔은 파랑이고
모든 파랑이 모인 혼돈이다
바다에서 태어난 모든 생명에
모든 파랑의 깊이와 힘이 있다
바다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해변에 누워 얘기하고,
잠이 든다.
박혜숙/ 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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