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 패트릭은 1,500년 전 영국에서 실존했던 인물이다. 아일랜드를 위해 본인의 삶을 바친 공로로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고 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가톨릭 교회 자체가 세인트 패트릭을 공식적으로 성인 서품을 한 적은 없다는 점이다. 이는 세인트 패트릭 성인을 무시해서가 아니고 서기 1,000년 전에는 교황과 교회의 역할이 현재와 같이 집중되어있지 않았던 때문이었다. 보통 1,000년 이상 된 성인들은 지역 사람들이 그를 성인이라고 믿으면 교회에서 인정해주는 식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세인트 패트릭은 영국에서 부유한 집안 태생으로 자랐으나 어려서 아일랜드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노예 생활을 했다. 가족들이 보낸 구조대에 의해 구출되어 영국 본토로 돌아온 다음 가톨릭에 입문하여 신부가 되었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어린 시절을 혹독한 노예 생활로 보낸 이후 현실적인 삶에 대한 집착을 버렸던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나이가 들자 오히려 자신을 납치하고 노예로 부려 먹은 아일랜드인들에 대한 연민을 기도 중에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소명은 아일랜드 야만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홀홀단신 아일랜드로 건너갔다고 한다.
당시 이교도이던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한다는 것은 거의 목숨을 건 행위와도 같았다. 끊임없는 위협과 협박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당시 핍박받던 아일랜드 사람들을 위해 봉사를 하면서 일생을 마친다. 그의 선종일이 서기 493년 3월 17일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3월 17일은 아일랜드 최고의 명절인 세인트 페트릭 데이가 된 것이다.
세인트 패트릭 데이가 이토록 아일랜드뿐 아니라 미국의 명절처럼 자리를 잡은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사실 미국 특히 뉴욕 일원에는 아일랜드 계 사람들이 많다. 소위 1845~1849년 사이 감자 기근으로 알려진 대 재앙이 발생했다. 이 기간 중 아일랜드 주민의 1/3이 영국, 미국, 캐나다로 탈출 했다. 이들 대다수가 보스턴과 뉴욕에 자리를 잡게 된다. 특히 맨해튼 남단, 현 차이나타운과 월스트릿 사이에 대규모 아일랜드 이민 거주지가 형성 되었다. 대다수가 못사는 농부 출신이었던 관계로 교육 수준이 최악이고 산업 도시에서 살아남을 기술도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당시 피부색은 백인이었지만 실제로 미국 사회에서 이들을 흑인들과 동급 취급을 했다.
그래서 이민 초창기부터 다민족 거주지를 형성했고 이민 사회, 빈민 사회의 고통을 대변했다는 데서 아일랜드 계 이민자들의 역정이 모든 이민자와 유색인종의 애환을 대변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일랜드 사람들의 축제이지만 미국 사회에서는 세인트 패트릭 데이를 모든 이민자, 소수민족, 못사는 사람들이 하나로 뭉치는 날로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이를 아이리시 전통이 특히 강한 중부 뉴저지 시튼 홀 대학교 교수이며 아일랜드계인 더모트 퀸은 아일랜드 문화를 한마디로 요약해서 ‘두둑한 전통, Thick Tradition’이라고 설명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아일랜드 속담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고통을 공유하는 애환의 형제, 자매라는 뜻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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