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 정치참여 선봉장...높아진 한인사회 위상 뿌듯
조지 부시 전대통령 부부와 함께 한 김재택 부부.
잔제이 대학 교수생활 32년을 뒤로하고 지난 2003년부터 은퇴생활에 접어든 김재택 박사의 요즘 생활은 여유롭다. 하루일과 중 오전시간은 신문 읽는데 대부분을 소비한다. 뉴욕타임스와 로칼지 더 레코드를 읽고 한국어 매체로는 한국일보와 중앙일보를 읽는다. 또 주간 타임지도 빼놓지 않는다. 주로 사설이나 칼럼을 즐겨 읽는 편이고 한국어 신문을 통해서는 뉴욕 한인사회 돌아가는 모습을 파악하고 뉴욕타임스는 정독하는 스타일이다.
때로 여행도 즐긴다. 국내여행도 하지만 계획을 세워 부부가 함께 세계여행 길에 오른다. 얼마 전엔 카리브해 연안국가 푸에르토리코와 버진 아일랜드등을 돌아봤고 최근엔 라인강을 따라 독일의 지방 여행을 다녀왔다. 과거 방문했던 대도시를 피하고 되도록 변두리를 찾는다. 연극 ‘알트 하이델버그’에 나오는 대학촌도 둘러보게 됐는데 ‘황태자의 첫사랑(The Student Prince))이란 영화로 한국에도 소개됐던 그곳은 생각보다 단조로웠다.
오는 4월엔 런던 증권사에 근무하는 아들 가족도 볼 겸 영국 여행에 나설 계획이다. 영국도 대도시 말고 스코틀랜드나 웨일스와 같은 시골을 둘러볼 생각이다. 평생 서울과 로스앤젤레스, 뉴욕 등 대도시 주변에서만 살다보니 변방의 전원다운 풍광이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 젊어서 부부가 열심히 세금 내고 연금을 부었던만큼 매달 받는 소셜 시큐리티와 연금으로 불편 없는 노후생활을 즐기는 셈이다.
지난해로 미국생활 50년을 넘긴 그에게 요즘 달라진 세태라면 각 지역에서 높아진 한인사회의 위상이다. 선거철이 되면 출마자들이 한인 유권자를 찾아다니며 한표를 부탁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띤다. 자신이 거주하는 뉴저지 잉글우드 클립스만 하더라도 한인표가 당락을 좌우할만큼 캐스팅 보트 역할도 하게 된 점이다. 70년대 후반 한인사회에 참여하면서 그때까지 이루지 못하던 정치력 신장을 외치던 장본인으로서 이제 그 바램이 가시권에 들어오고 있다는 감을 느낀다. 정치력 신장의 한 방법으로 미국정치 참여의 새 장을 연 선봉장으로서 그는 카터 대통령 시절 민주당 아시안 조직을 통해 연방정부와 연계를 맺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백악관도 찾았고 뉴욕주지사도 만나면서 한인사회의 존재를 알리는 노력을 기울였다. 또 한인회장 시절(1992년-94년)에는 뉴욕시를 비롯, 각 보로청장, 검찰총장도 만나면서 한인사회의 위상을 높이는데 주력했던 그였다. 현직 학자로서 한인회장을 겸했던만큼 미 주류사회가 받아들이는 태도가 달랐다. 이중언어가 가능했으므로 그 효과도 컸다. 한인사회 단체들이 참여하고 협조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데도 일조를 했고, 그런 일을 하는데에는 무엇보다도 전통을 가진 기관으로서 한인회가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가 제22대 뉴욕한인회장에 당선될 때는 ‘돈 한푼 안쓴 후보’라는 기록도 세웠다. 교수 출신으로 미국사회를 보는 시각이 좀 다를테니까 기대를 해보자는 여론이 형성되어 전임회장을 비롯 20여명의 중진들로 추대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돈걱정, 선거운동 걱정 하지 말라며 추대위가 출범했고 경선에서 여유있게 타후보를 따돌리며 당선됐다. 오랜만에 혼탁한 돈선거 오명을 지웠던 시기였다. 그러나 회장에 당선되고 나서 다음날부터 한인회관이 날아갈뻔한 위기가 닥쳐왔다. 악성 모기지로 높은 이자를 물면서 만기가 도래해 있었고 누적된 범칙금으로 인해 당장 건물이 차압될 상황이었다. 그걸 해결하느라 한인회장은 자신의 시간을 효과있게 사용하지 못하고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회관 문제는 외환은행 등 한국계 8개 은행들의 협조로 악성 모기지를 양질의 모기지로 바꾸는 방향으로 해결했다. 이로인해 회관의 관리비도 크게 줄어들고 회관 운영에도 숨통이 트이게 됐다.
대학교수가 한인회장에 당선됐다며 잔제이대 게리 린치 총장과 빌 린치 뉴욕시 부시장이 공동주최로 축하 리셉션도 열어주었다. 한국계 지상사들의 단체인 코참과 함께 ‘힘있는 한인사회를 위한 연례 모금파티’를 공동주최, 팰리세디엄에서 열린 파티는 1인당 250달러의 참가비에도 불구하고 600여명이 참석하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지상사와 금융단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1992년 LA 흑인 폭동이 발생했을 때에는 모금운동을 전개, 6만2,000여달러의 성금을 LA범동포대책위원회에 전달한 일도 있었다.
그는 창설 33주년을 맞는 코리안 퍼레이드의 산파역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당초 한국일보의 아이디어로 퍼레이드의 허가를 얻는 과정에서 당국의 협조를 그가 얻어냈던 것. 그가 강의하던 잔제이대가 사법행정대학원이었으므로 학생들 중에 시청 산하 위생국, 소방국, 경찰국, 시장실등 주요 직책에 제자들이 많았다. 그들과의 유대관계가 좋아서 활용한 케이스였다. 첫해 퍼레이드에 에드워드 카치 시장이 그랜드 마샬로 참가했고 데이비드 딘킨스 시장을 비롯한 후임 시장들이 으례 참가하는 주요행사로 발돋움했다.
그는 한때 유대계 커뮤니티보드의 반대에 부딪쳐 구어메 레스토랑을 열지 못하고 있던 한인 최규성씨의 인종차별적인 사건에 간여, 당시 뉴욕시장 후보로 거론되던 앤드루 스타인을 소개함으로서 사건의 성공적인 해결에 한몫을 담당했다. 언제 어디서나 의협심 강한 성격을 그는 버리지 못한다. 백악관 아시안 자문회의에 늦게 참석한 홀브룩 보좌관에게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고 불쾌한 언사를 쓴 이민국장에게 호통을 친 기억도 있다. 현직 한인회장에게도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소신행동도 목격된다.
그의 미국유학은 1961년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의 트리니티 대학원으로부터 시작됐다. 한국전 시절 통역장교로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한 직후였다. 텍사스에서 두학기를 마치고 아르바이트를 위해 로스앤젤레스를 찾았던 김에 저녁시간 강의를 들을 수 있는 남가주대(USC)에 입학했다. 한국서 약혼한 신부도 이때 합류, 결혼하면서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맨손으로 와서 낮에 일하면서 저녁에는 학업에 매진하던 때였다. 김재택은 행정학을, 부인 윤양자는 교육심리학을 전공했다.
1970년 버지니아주 브리스톨의 감리교 계통 에모리 앤드 헨리 칼리지에서 조교수로 초빙받아 이주했고 이듬해 모교인 남가주대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던 중 운좋게 뉴욕시립대의 하나인 잔제이대로 부터 초빙을 받아 72년부터 뉴욕생활이 시작됐다. 부인도 뉴욕시 교육국 심리학자로 채용되어 일했고 뉴욕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종무 국사편찬위 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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