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100주년 축하연에서 프레드 캐리 코리아 소사이어티 사무총장과 부인 정현용 박사.
전쟁통 미군부대 통역에서 한인이민사 주역으로
통역장교단 일원으로 미 유학길...내년이면 미정착 60년
1960년은 한국이나 뉴욕한인사회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매듭이다. 해방후 12년간 자유당의 이승만 정권이 독재의 말기증상을 보이다가 4.19 학생혁명으로 종말을 고한 한국정치사에 있어서 중대사건으로 기록된다. 한편 뉴욕한인사회에서는 “국내 학생들의 숭고한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와 함께 그때까지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던 동포들이 하나로 뭉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동참의지를 가진 인사들이 모여 구심체로서 뉴욕한인회를 창립시키는 역사적인 사건의 해가 되었다.
이때 뉴욕한인회 창설 주역들은 해방전부터 뉴욕일원에 거주해오던 원로그룹과 신생 대한민국 여권으로 미국에 유학 온 젊은 학생그룹으로 크게 분류됐다. 말하자면 신구세대가 한데 어울려 창설된 것이 뉴욕한인회의 모습이었다. 그해 6월12일 뉴욕한인교회에서 실시된 초대 한인회장 선거는 먼저 11명의 실행위원을 뽑고 그 실행위원들을 통한 간접선거제를 택했다. 실행위원 선거 득표결과를 보면 윤치창 19표, 강한모 18, 김일평 17, 김준성 14, 김배세 13, 호기
성 13, 김형린 12, 이범선 12, 노재봉 12, 한영교 11, 손재승 10 표순이었다. 이들 가운데 윤치창, 강한모, 김준성, 김배세, 한영교 등은 원로그룹에 속했고 김일평, 이범선, 노재봉 등은 학생회멤버들이었다. 이들에 의해 치러진 회장선거에서 최다득표를 한 서상복이 결국 한인회장에 당선됐지만 그만큼 학생그룹의 파워도 만만치 않았던 점을 엿볼수 있었다.
이 시기 뉴욕지역한인학생회의 회장은 컬럼비아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김일평이 맡고 있었다. 한창 공부에 열중해야 할 학생들이 그당시 한인회라는 현실참여를 결심하게 된 동기에 대해 김일평은 ‘뉴욕한인회 50년사’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뉴욕한인회 창립멤버로 참석한 나는 뉴욕한인회의 창립을 목격하였고 또 그후의 발전을 지켜보았다. 1950년대 뉴욕에 정착하여 살고있는 한인은 극소수에 불과하였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일대에 살고있는 한인은 대부분 유학생이었다. 150명으로 추산되던 한국인 유학생들은 정의감에 불타고 있었고 조국의 통일을 생각하는 애국자들이었다.” 뉴욕한인회가 창립은 되었지만 당시 한인사회의 주류는 역시 학생 멤버들이었다. 한인회가 상대적으로 약세에 있었기 때문에 한인회 조직에서 부터 운영에 이르기 까지 학생들의 역할이 컸던 점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 무렵을 전후해 김일평은 폴랜드계 정치학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라는 미국정치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과 접하게 되었다. 후에 그는 지미 카터 행정부에서 백악관 안보보좌담당관으로서 자주 헨리 키신저와 비교되던 인물이었는데 포드재단으로부터 100만 달러의 연구기금을 받아 컬럼비아대에 공산권문제연구소를 설립했다. 김일평으로서는 ‘소련의 대한반도 정책’이란 논문으로 컬럼비아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브레진스키 밑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중이었다.
학위 심사위원 중 한사람이었던 브레진스키는 김일평에게 비교공산주의 연구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때마침 소련과 중공 문제가 표면으로 부상하고 있었고 브레진스키는 김일평이 동양인이니까 중국어를 쉽게 해독할수 있을 것이고, 이미 소련 공부를 했으니 소련과 중공의 체제를 비교하면서 두나라가 북한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그에 따라 김일평은 1961년 설립된 컬럼비아대학원 부설 공산권 문제연구소의 초대 연구생이 된 셈이었다.
당시만 해도 중국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에 대한 연구에 미개척 분야도 있었다. 그는 1920년대 소련으로 유학을 갔다가 돌아온 28명의 중국인들이 1930년대 당권을 장악했던 소위 강서성 시대의 중국 소비에트 공화국 건설 역사에 관심을 두었다. 그리고 60년대초 중소분쟁이 시작되면서 학계의 주목을 받았던 그 시대의 연구는 중소분쟁을 이해하는데 기초적인 자료가 되었다. 소련 유학생들이 돌아와 정권을 잡았을 때 소련의 모델을 그대로 도입했느냐, 아니면 창조적 중국 공산주의를 적용했느냐 하는 논쟁 속에서 그는 연구테마를 정했다. 이 연구를 위해 그는 홍콩도 다녀왔다. 한때 모택동에게 이념적인 도전을 했다가 도망쳐 나온 장국도라는 인물과 인터뷰도 했고 홍군(인민해방군) 참모장까지 지낸 궁추라는 사람도 만났다. 그 산물로 중국 공산주의 운동사에 있어서 중요한 저서도 출판했다.
그보다 좀 늦은 시기이지만 그는 70년대말 미국학자들과 함께 소련과 중국을 둘러보는 연구여행의 기회를 살려 철의 장막과 죽의 장막을 파헤치는 학자로서의 입지를 확고하게 굳혔다. 이때 ‘모스크바에서 북경까지’라는 저서를 냈고 82년에는 미국 학자들과 함께 북한을 방문, 평양과 금강산을 둘러보는 기회도 가졌다. 그와같이 여러차례(3차례)의 공산권 방문으로 얻어진 결론은 공산주의 사회의 체제 및 사상 내부에 무수한 갈등이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공산권 문제의 전문성을 인정받은 그는 한국부터의 초청도 여러차례 받았다. 1979년 한양대 대학원장 초빙에 응했던 기회에 느낀 것은 국내 학계의 판단기준, 가치기준이 미국 것과 너무나도 달라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에서는 전문지식의 기준보다 인맥이 중요하고 지역, 출신학교로 이어지는 관계가 더 큰 작용을 하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학위를 둘러싼 이면에는 금전과 인맥관게의 부조리들이 개입되어 눈쌀을 찌푸리게 했다.
내년으로 미국생활 60년을 맞게되는 김일평은 미국이 고향인 셈이다. 그러나 청년시절 6.25 동란을 만나 그의 인생역정이 바뀌게 된 조국을 결코 잊을 수는 없다. 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 그는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신입생이었다. 강원도 영월 출생의 풋나기 입학생으로 전쟁통 귀향길에 미군부대 통역으로 채용되었다. 원주농고 다닐때 미국감리교 선교사들이 마련한 성경공부반에 들어 열심히 영어회화 공부를 했던 실력이 그렇게 유효하게 쓰일 줄은 몰랐다. 미8군 연락장교로 있을 때 제7기 통역장교 모집에 응모, 임관하면서 한국군에 배치되어 미군과 공동작전을 펼치는 전선에 투입됐다.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을 시작으로 미제9군단과 한국군 제2군단의 공동작전에 참전했다. 제2군단장은 백선엽장군이 맡고 있었고 그 산하에서 김일평 중위는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의 통역도 맡았다.
▲밴플리트 장군 통역 시절. 왼쪽부터 유재흥장군, 백선엽장군, 김일평 중위, 밴플리트 대장.
휴전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통역장교단의 일부 학구파들은 미국유학을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정일권이 군단장으로 오면서 이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유학시험에 합격한 장교들에게 ‘유학제대’를 시켰다. 김일평도 그중의 한명으로 미국유학의 기회를 얻었다. 정일권 군단장의 신원 보증으로 유학길에 오른 김일평은 켄터키 주립대 애스버리 칼리지에 입학했다. 켄터키에서 4년을 보낸 김일평은 1957년 가을 뉴욕의 컬럼비아대학원으로 진학하게 되었다.
뉴욕에서 공부하면서 학생회와 한인회 창설에 일조했던 김일평은 1963년 하와이 동서문화센터 연구원으로 채용되어 그곳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주로 아시아쪽 교수들과 미국 교수들간의 공동세미나를 맡아 했다. 2년간의 하와이 생활은 뉴욕에서 만나 결혼한 부인(정현용)과는 신혼생활이었으므로 특별한 감회가 있었다. 이어 1965년 인디애나 주립대 조교수 초빙에 응하면서 5년간 소비에트 정치론과 동아시아 정치론을 강의했다. 1970년은 그의 도약의 해로 다가왔다. 커네티커트 주립대로부터 부교수 보직과 함께 종신교수로서의 초빙이 왔던 것. 이후로 커네티컷에 정착한 김일평은 정치학 교수로서 단단한 위치를 굳히면서 76년 정교수가 되었고, 동대학 부설 동아시아연구소의 소장도 겸임하면서 권위를 인정받았다. 그후로 20년간 후진들을 가르치며 1998년 명예교수로 은퇴생활에 접어들었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절 평통 명예위원으로서 역할을 했으며 2003년에는 뉴욕한인 이민100년사 편찬위원장으로서 역할을 감당했다.
지난 2010년으로 8순을 넘긴 김일평 부부에게 뉴욕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청년시절 뉴욕한인회 창립에 공헌했고 풋풋한 사랑으로 해후를 만났던 곳, 부부는 스토스라는 커네티컷 주소를 가졌지만 초청강연 일정이 있거나 중요한 공연이 있을 때 1박2일 코스로 뉴욕을 방문해 지하철을 타고 한국식당을 섭렵하는 영원한 뉴요커로 살고있다.
조종무<국사편찬위 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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