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경
대학강사·수필가
지난달, 겨울방학을 맞아 집에 온 아이와 크리스마 스 선물을 사러 백화점 쇼핑을 나섰다. 프랫즐 가게를 지나는데 아이 어렸을 때가 생각났다. 사먹자고 조르면 집에 가서 만들어 먹자고 달래며 손목을 끌고 가게를 지나쳤었다. 줄이 길어 한참 기다려야 했고 직접 만들어 먹으면 깨끗하고 재미있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비싼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아이가 아빠보다 훌쩍 더 커져 대학으로 떠나버린 어느 날, 나 혼자 쇼핑하다 프랫즐 가게를 지나칠 때였다. 몇몇 아이들이 제 얼굴보다 더 큰 프랫즐을 들고 무척 행복해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엄마의 미소는 더욱 행복해 보였다. 문득, 나와 내 아이에게 그 간단하면서도 큰 행복의 기회를 주지 않았던 후회가 밀려와 가슴이 찡 했다. 그후 프랫즐 가게를 지날 때면 항상 후회를 곱씹었다.
그래서 이번엔 그 행복을 만끽하려고 프랫즐을 먹자 했더니, 밥 금방 먹었는데 뭘 그런 걸 먹느냐며 자기는 안 먹겠으니 엄마나 먹으라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덩치 큰 아이의 넓은 보폭을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면서 아이의 어른 되어감이 은근히 섭섭하던 차였는데, 이건 아예 아이가 어른이 되고 내가 어린아이가 되어 칭얼거리는 꼴이었다. 아, 너무 늦었구나! 그 아기자기한 행복을 맛 볼 기회가 없어졌다는 생각에,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뻐엉 뚫렸다.
그즈음, 10년 전 연장자 의료아파트로 이사 나가셨던 옆집 할머니가 아들에게 물려주었던 집으로 다시 들어오셨다 얼마 남지 않은 날들 동안 아들이 직접 모시기로 한 것이다.
99세의 할머니는 17년 전 처음 뵈었을 때처럼 단정하고 젊어보이신다. 하지만 치매로 우리를 기억하진 못하신다. 찾아갈 때마다 우리를 소개하면 생각난다며 재미있는 말솜씨와 넘치는 에너지로 대화를 끊임없이 이으신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생각해보면 전혀 내용 없는 말들뿐이다.
손주가 없어서 우리 아이를 무척 예뻐해 주셨고, 아이 학교의 ‘할머니 날’이면 못 오시는 할머니 대신 손을 잡고 행사에 참석해주시곤 하셨는데. 아직 예쁘고 활기 넘치시지만 기억의 서랍장은 텅 빈 할머니를 지켜보며 가슴에 또 다른 큰 구멍이 뻐엉 뚫렸다.
프랫즐 든 아이의 행복한 얼굴을 즐길 ‘때’를 놓쳐버리고 옆집 할머니와 기억을 얘기할 ‘때’를 놓치고 나니, ‘무슨 일이든 다 때가 있다’는 상식적이고 흔한 말이 처음으로 진하고 무겁게 다가왔다.
지난해는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친구가 암에 걸리고, 나 자신은 대상포진에 걸리는 등 정신적, 육체적으로 참 힘든 해였다. 그래서 새해를 기다렸으나, 실은 그 모든 일들이 나이 때문에 생긴 일들이라 새해를 반길 이유가 전혀 없었다.
시아버님 가신 것도 연세 때문이었고, 친구의 병도 나이 먹어서였다. 나도 나이 때문에, 공간개념이 흐려져서 10여년 그 자리에 있는 집안가구에 부딪쳐 멍들곤 했고, 운동신경이 둔해져서 넘어지면 전처럼 재빨리 일어나지 못했고, 인식능력이 낮아져 농담을 들어도 남보다 늦게 웃었던 것이다.
친정어머님과 시어머님은 적극적, 창의적인 완벽주의자들로 자존심과 독립심이 강하시다. 그래서 노인 되는 과정을 겪으며 많이 힘들어 하셨다. 무엇보다 신체능력을 너무 믿으셔서 그랬다. 특히 시어머님은 지팡이 사용을 거부하시며 계속 다치셔서 당신과 가족들을 참 힘들게 하셨다. 지혜로움까지 더해 내 삶의 모델이셨던 두 분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왜 그 지혜가 노쇠를 인정하는 데는 이용되지 않는지 참 답답했다.
나의 새해다짐은 ‘노쇠 인정’을 일찌감치 연습하는 것이다. 그러면 노인이 되었을 때, ‘때’ 맞춰 준비가 된 노인이 되어 가슴에 또 다른 구멍을 뚫지 않아도 될 것 아닌가.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