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중반 남미시장 개척단 일행. 가운데 선글래스 낀 사람이 안병권
반도상사 초대 뉴욕지사장으로 와 원맨 오퍼레이션 운영
시설.지원 열악한 상황서 차에 가발 싣고다미녀 시장개척
뉴욕주재지사협의회 만들어 한국상품 전시회등 개최 큰 성과
▲지난 2008년 6월 인터뷰 당시의 안병권
지난 12월초 한국 지식경제부는 한국이 연간 무역 1조달러를 달성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수출 5153억, 수입 4855억 달러로 미국, 독일, 일본, 중국,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이탈리아에 이어 9번째 1조 달러 무역국가가 된 것이다. 대한민국이 건국한지 63년 만에,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의한 수출드라이브 경제정책 추진 50년만에 세계무역 1조 달러 클럽에 대한민국의 이름을 올린 셈이다. 시골 여인네들의 머리카락을 잘라 만든 가발과 우뭇가사리로 만든 한천을 내다 파는 등 돈 되는 건 모두 내다 팔았던 그 시절. 쥐털로 코트를 만든 코리안 밍크, 투스픽, 손톱깎기, 라이터도 수출했다. 70년대 한국사회의 키워드는 한마디로 수출과 LC였던 시절 피눈물 나는 현장에는 이제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수출역군들의 숨은 희생이 있었다. 그리고 그 희생의 전진기지는 바로 뉴욕이었다.
한국수출의 전진기지로 발진할 당시의 뉴욕은 그야말로 황량한 미개척지였다.
이 무렵 현 LG그룹의 수출창구였던 반도상사 초대 뉴욕지사장으로 발령받은 안병권은 ‘네이키드 카우보이’처럼 벌거벗은 모습으로 뉴욕땅에 발을 디뎠다. “지사요원이라고 해봤자 대개 원맨 오퍼레이션이었어요. 기거하는 아파트나 아니면 조그만 사무실 하나 얻어 혼자 일을 했습니다. 외환사정이 워낙 나빴던 때였으니까 한달에 2,000 달러, 많아야 5,000 달러, 상사의 수출실적에 따라 송금이 왔는데 그것으로 임대료, 인건비, 운영비를 모두 충당하려니 벅찼지요, 샘플실도 없어 차에다 싣고 돌아다니던 시절이지요.”
요즘엔 인터넷이다, 팩스다, 화상회의다 해서 불편없는 통신시설이 최첨단을 걷고 있지만 안병권이 뉴욕에 떨어지던 1969년만 해도 편지나 전보가 일상적인 본사와의 통신수단이었다. 시급을 요하는 경우 텔렉스를 이용했는데 그 덜덜거리는 텔렉스가 또 요물덩어리였다. 텔렉스 기계에 부착된 테이프에 문자를 펀치해서 보내는데 RCA나 ITT에 일찍 신청을 해도 주로 밤시간에나 송신이 가능했다. 스위치를 잘못 눌러 애를 먹거나 밤시간에 국제전화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옆집사람들을 깨우고 경찰관이 출동하는 경우도 자주 당했다.
당시 지사 요원이라야 삼성그룹에 두어명, 쌍용그룹이 한세라는 이름으로 나왔고, 천우사, 삼호무역, 대우, 반도상사 등 원투맨 오퍼레이션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역할은 주로 상품 판매, 제품 개발과 시장 개척이 주요업무였다. 바이어를 발굴하고 기존 거래선과 유대강화, 거래를 증진시키는 일이었다. 어느 정도 판매가 이루어져 자리가 잡히면서부터는 재고, 수금을 위해 관리요원들이 파견돼 나왔다. 본사의 사세확장과 필요한 외국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금융요원들도 파견되는 추세였다.
70년대 한국산 주요 수출품목들은 주로 노동집약적이고 저렴한 인건비로 경쟁력이 있는 제품들이었다. 가발이 전략상품으로 인기를 끌었고, 섬유 봉제 제품으로 기성복과 실크 제품, 섬유원단도 수출되었다. 운동기구, 어망, 잡화, 비닐제품, 장남감, 악기 외에 전기, 전자제품으로 트렌지스터와 라디오, 녹음기등이 수출되었다. 그때 반도상사의 주요 수출품목은 단연 가발이었다. 영등포 공장을 인수받아 일제 카네칼론 원사로 인조가발을 만들어 수출했는데 전략상품으로서 가치가 있었고 기성복, 트랜지스터 라디오 등이 경쟁력있는 품목들이었다.
이 무렵 뉴욕에서 각개약진하던 지상사들의 결집체로 뉴욕주재지사협의회(Korean Trader’s Representative Club of NY)가 필요에 의해 결성되었는데 이때 안병권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되었다. 1975년 코트라의 협조로 114개 회원사 대표들이 모여 시장정보 교환, 시장개척 공동활동, 애로사항 대정부 건의, 친목을 목적으로 창립을 보았다. 이때 초대회장에 선출된 박영수가 2개월만에 본국발령을 받아 갑자기 떠나고 부회장이던 안병권이 전권을 맡아 후속작업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실제론 창립회장이나 마찬가지였다. 평소 생각해두었던 단체성격의 사업들을 실행에 옮겼다. 같은해 약 2주간에 걸쳐 중남미, 북미주 6개국 시장개척단 파견사업에는 10개상사가 참여했다. 코트라와 공동으로 주관한 이 사업으로 한국상품들이 소개되었고 새로운 바이어들도 연결되었다. 이때 금성사의 트랜지스터가 인기를 독차지했다. 또한 그해 말에는 한국종합상품 전시회를 코트라, 뉴욕총영사관과 공동으로 주최했다.
75년 12월2일부터 4일까지 3일간 뉴욕시내 세인트 모리츠 호텔에서 23개사가 참가한 전시회에는 1천여 고객들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 주로 바이어, 미경제계 인사들, 동포 비즈니스계, 한국기관 등이 초청된 이 전시회에서 2,500만달러를 수주하는 성과도 올렸다. 이 시기에 뉴욕에 파견됐던 한국정부 기관들은 예외없이 모두 수출 드라이브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였다. 총영사관, 대사관, 유엔대표부를 비롯, 코트라, 무역협회, 재무부, 한국은행 및 시중은
행들, 그리고 기타 조사기관들이 그랬다.
초기 7~8년을 정신없이 뛰었던 최일선 첨병으로서의 역할이 끝나고 그는 1977년 본사에 들어가 사표를 냈다. 어느새 성장한 세 딸들의 교육과 미래를 위해 미국에 남기로 했다. 새파란 청년시절을 그렇게 불사른 현장에 남보다 뒤늦은 이민생활에 뛰어든 셈이었다. 개인 비즈니스를 했다. 한국은 자원이 부족해 항상 원자재를 외국에 의존해왔던 점을 고려해 70년대 말부터 가죽제품을 취급했다. 피혁제품 원자재인 원피를 한국, 일본에 수출했다. 기술적인 지식이 많이 필요치 않았고 한때 잘 나가던 원피사업이 날이 갈수록 자본이 많이 들고 이제는 생산자와 실수요자가 직접 거래하는 시기가 왔다. 지난 2007년 그 사업도 접고 은퇴생활에 접어들었다.
반도상사 수출과장 시절부터 먼발치서 눈여겨 보아왔던 필자와의 심층인터뷰는 2008년 6월에 이루어졌다. 별로 할일도 없어 보였지만 그는 팰팍에 조그만 사무실을 얻어 자신만의 공간을 누리고 있었다. 인터넷도 검색하고 친지들과 전화도 하며 여유있는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40년 만에 다시 찾은 원맨 오퍼레이션이었다. 여가생활로 FGS에서 주2회 국선도 심신수련 강의를 했고 가끔 친구들과 골프를 치며 건강을 유지한다고 했다. 1년에 한번쯤 한국에 나가 성묘도 하고 자라나는 손주들 재롱을 보는 것이 낙이라고 했다. 큰 꿈보다도 그게 아메리칸 드림의 성취가 아니냐고 반문했다.
2-3시간에 걸친 인터뷰가 끝나고 다음달쯤 식사나 하자며 헤어졌던 그로부터 1년 넘게 소식이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우연한 기회에 그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단전호흡 강의도 하며 건강하던 그. 믿겨지지 않아 두드린 전화 속에서 한국말이 들렸다. 너무 늦은 암발병 사실과 갑작스런 죽음으로 경황이 없는 가운데 교회사람들과 조촐하게 장례를 치렀다는 부인 한영숙 여사의 대답이었다. 향년 73세. 이제 다음주 1월15일이면 그의 2주기가 된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