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12월7일로 날짜가 찍힌 원로들의 점심식사 사진. 왼쪽부터 김형린, 임창영, 김매리, 한승인, 베씨김, 손진실, 그리고 필자.
1960년 7월17일 일요일. 브롱스 밴코틀랜드 팍에 한인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가족동반의 중년들을 비롯해서 20대 유학생 그룹, 재외공관 직원 등 뉴욕일원 한인들이 망라된 야유회가 그곳에서 열렸다. 뉴욕한인회가 창립되고 나서 한달만에 마련된 첫번째 야유회였다. 한여름에 치러지는 행사인만큼 주최측은 코카콜라와 아이스크림을 참석자들이 양껏 마실 수 있도록 특별히 준비했다. 푸짐한 음식과 김치도 넉넉히 준비되었다.
▲베씨김
당시의 기록을 보면 한인회는 해방후 처음으로 동포들이 한자리에서 만나는 역사적인 야유회를 위해 사전준비를 나름대로 철저히 했음을 알 수 있다. 준비위원장에 베씨김 실행위원을 임명하고 생활에 여유가 좀 있는 동포들을 중심으로 성의껏 준비를 했다. 150명분의 닭고기와 숙주나물을 장만했던 김형린, 코카콜라 회사 및 브라이어 아이스크림 제조회사와 교섭을 벌여 24병들이 콜라 13상자와 아이스크림 100통을 기부받은 베씨김, 밥을 담당한 한영교 부부, 김치 2갤런씩을 담당한 호기성, 손재승, 이범선 등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가정을 이루고 사는 동포들이었다. 당시는 자가용을 가진 동포들이 많지 않아 피크닉 장소를 지하철로도 닿을수 있는 밴 코틀랜드 공원으로 정했다.
한인회 총무 김준성 목사의 여흥순서도 곁들여 참석자들은 모처럼의 야유회를 마음껏 즐겼다. 당시만 해도 한인회 기성인사들 보다는 유학생회 멤버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젊은 유학생들이 웬만해서 접하기 힘든 쌀밥과 김치를 포식한 자리였다. 행사가 끝나고 7월31일 소집된 실행위원회에서 김형린 회계에 의해 보고된 결산내용은 70달러의 야유회 경비였고 뉴욕총영사관이 학생회에 야유회 기부금으로 희사한 50달러를 한인회에서 접수하지 않기로 했다. 또한 야유회를 성공적으로 이끈 베씨 김 준비위원장을 박수로 치하했다.
베씨김은 그 당시 남편 김경과 함께 맨해튼 43가 8애비뉴에서 미국식 레스토랑을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여유있는 미국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1950년을 전후해 남편은 임병직과 부동산 사업을 한다며 워싱턴을 자주 오르내리는 동안 자신은 한미재단에 취직이 되어 미국사회를 많이 배울 수 있었다. 1950년대 한국전쟁이 한창일 무렵에는 한미재단의 역할이 실로 컸다. 각지에서 답지한 구호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이를 선편으로 한국에 보내는 작업이 베씨김의 일이었다. 각 지역 봉사단체에 공문을 띠워 구호를 호소하고 구호품을 보내온 단체나 개인들에게 고맙다는 답장을 밤이 새도록 타이프로 쳤던 일은 고달프면서도 보람된 일이었다. 이때 미국사회를 배웠기 때문에 뉴욕한인회 야유회때 코카콜라와 아이스크림을 다량으로 기부받을 수 있었다.
베씨김의 처녀시절 이름은 임배세였고 만물상을 경영하던 아버지의 배려로 이화학당을 다니던 1920년대초 금주가를 작곡해 이 노래가 찬송가에 실리는 놀라운 일도 벌어졌다. 이무렵 하와이에서 기독학원을 운영하던 이승만이 김노디를 한국에 보내 교사를 물색하던 중 그가 눈에 띠인 것은 행운이었다. 음악을 통해 이 나라와 교회를 위해 정열을 바치려던 그의 염원의 첫 단추가 채워진 셈이었다.
1925년 김노디를 따라 하와이에 도착한 26세의 처녀 임배세는 기독학원의 교사로 채용되어 주일이면 한인교회의 반주자로, 성가대 지휘자로, 때로는 이승만의 청에 따라 학원 유지를 위한 모금운동으로 하와이 5개섬 동포들을 찾아다니며 호소하는 일도 했다. 동포들을 모아놓고 독창과 연설을 하면 대개 1달러씩 던져주었다. 계약대로 2년을 보낸 하와이 생활은 그런대로 보람이 있었다. 그러나 음악공부를 하고싶은 욕망을 누를 길 없어 이승만에게 본토에 보내줄 것을 간청하자 처음 망설이던 이승만도 공부를 더 해야 되겠다는 소박한 청을 거절하지 못해 그를 오하이오 오블린 음악학교에 입학까지 알선해 주었다.
오블린을 거쳐 일리노이 웨슬리안대 졸업 무렵 시카고 한인교회에 나갔다가 키 크고 미남 유부남인 김경으로 부터 프로포즈를 받았다. 유학생 출신으로 미국 여인와 결혼, 두 아들까지 둔 가장으로 캐피티리어를 경영하던 김경은 그때까지 한국여인을 만나기 어려워 할 수없이 미국여인과 결혼했는데 이제 마음에 드는 한국여인을 찾았으니 부득이 미국부인과 이혼하고 한국여인과 결혼을 해야되겠다는 주장을 폈다. 부인도 그뜻을 선뜻 이해하고 이혼을 승락했으므로 이 커플은 이듬해 동포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려 시카고 지역에서 큰 화제꺼리가 되었다.
김경과 결혼하면서 그는 김배세가 되었지만 베씨라는 미국이름을 더 좋아했다. 시카고에서 김경은 캐피티리어를 3개나 경영하는 알부자였으며 한때 집도 지어 팔았는가 하면 유대인과 동업으로 의류도매업도 벌여 의식주를 섭렵한 비즈니스맨이었다. 비슷한 시기 미시간에서 ‘라초이’라는 식품회사를 경영하던 유일한과 우정을 맺기도 했다. 부부가 뉴욕으로 이사온 것은 해방직전 중국인들과 함께 벌였던 비즈니스에서 20만 달러를 날리고서였다. 경험이 있는 캐피티리어로 맨하탄에서 재기에 성공했고 그곳서 해방과 한국전쟁도 맞았다. 1966년 78세를 일기로 김경이 타계하자 홀로 남은 베씨김은 롱아일랜드대학의 도서관 직원으로 채용되어 지난 81년까지 15년간 재직하며 뉴욕한인회 창설에 참여했고 브루클린에 설립된 뉴욕한인중앙교회 장로로서 교회를 섬겼다. 그리고 지난 1999년 12월 18일 타계했다. 영결식에서 그의 육성이 담긴 테이프가 돌아가자 장내가 숙연해졌던 기억이 새롭다.
필자는 지난 1986년 뉴욕일원의 한인 원로 여섯분을 모시고 점심식사를 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분들을 한자리에 모시게 된 것도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연배대로 열거한다면 김형린(당시 89세, 3대 뉴욕한인회장), 베씨김(87세), 손진실(84), 한승인(83, 초대 주불공사), 김매리(82, 학교종이 땡땡땡 작곡자), 임창영(77, 전 유엔대사) 등이었는데 식사 중 필자가 과거
독립운동가 중 누구를 존경하는가 라는 질문에 파가 갈라지는 모습이 선명했다. 이때 이승만을 꼽았던 사람은 베씨김과 손진실, 안창호를 택한 사람은 김형린, 한승인이었으며 임창영은 서재필을, 김매리는 김규식을 각각 지지했다. 여섯분 모두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한때 뉴욕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염원하던 애국지사들이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조종무<국사편찬위원회 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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