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민생활로 깨달은 고국사랑이 내 ‘시’ 원천
맑은 시만큼 살아온 궤적도 반듯한 마종기 시인이 10월28일 ‘작가와의 만남’에서 뉴욕독자들을 만났다.
한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이민 1세들은 국어책에서 그의 시를 배웠다. ‘재미시인 마종기!’, 그는 먼 이국땅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모국어로 시를 써오는 신비한 존재였다. 뉴욕한국일보 편집국에서 시인 마종기를 만났다.
▲수십년 동안 만나고 싶었다
마종기(馬種基,72)의 시는 이민자들에게 수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시 ‘우화의 강’ 중 ‘큰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라든가 시 ‘산수유’ 중 한 대목인 ‘나는 이제 고국에서는 바람으로만 남겠네’ 라는 부분은 읽는이의 가슴에 쿡 지르는 통증을 가져다준다. 또 이민생활을 함께 하던 남동생이 무장강도에 의해 사망한 후 쓴 시 ‘겨울묘지’ 중 ‘묘지 근처의 공기는 언제나 먼 곳을 보고 있다. 나는 너무 아프다고 중얼거린다’는 싯귀에서 우리는 도저히 그의 팬이 안될 수가 없다.
그의 시는 쉽고도 진실하다, 따스한 온기도 흐른다. 이민생활을 하는 우리의 삶을 같은 이민자로서 위로해주고 다독거려 준다. 지난달 28일 뉴욕한국문화원에서 열린 ‘작가와의 만남’ 참석차 뉴욕을 방문한 마종기의 시 낭송을 들으러 온 머리가 허연 노인팬은 “수십년동안 만나고 싶었다”며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는 최근 큰 상 두 개를 받았다. 지난 10월 1일 고원기념사업회는 제1회 고원문학상 수상자로 마종기 시인을 선정했다. 수상작은 시집 ‘하늘의 맨살’, 시상식은 오는 17일 LA에서 열린다. 지난 10월 22일에는 한국의 ‘제6회 혜산 박두진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000만원 상금은 모두 그가 회장으로 있는 대한의사협회 산하 대한문학의학학회에 기증됐다. 2년 전 창설된 이 학
회는 내달에 학회지 3호가 나올 예정이다. 작년에는 마종기 시인 시력 50년 기념의 밤이 고국의 후배문인들 주최하에 서울에서 열리기도 했으니 그는 모든 미주문인들에게 ‘외국에 나가 살아도 한국문학을 할 수 있다’는 꿈을 심어줌과 동시에 미주문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수십년간 의사 생활만 하다 삶이 다 가는 것 같아 조기은퇴했다’는 그는 지난 2002년, 1966년부터 35년 이상을 일하던 오하이오 의대 소아과/방사선과 교수이자 방사선과 의사 생활을 물러났다. "플로리다 올랜드 근처에 집이 있지만 더운 여름이 되면 애들이 있는 피츠버그를 비롯, 미국 여기저기를 오가며 살고 있다. 평생 보고 싶었던 친구들을 만나러 한국에 가서 몇 달 머물기도
한다. 틈틈이 자서전을 쓰고 있고 뉴욕, LA, 캐나다 지역 문학 강연을 간다”며 근황을 전한다.마종기는 제1회 미주한국일보 신춘문예를 시작으로 수십년 동안 심사위원으로 활동, 미 전국에서 투고된 시 작품을 심사하여 100여명의 문인들을 발굴, 한국문단에 데뷔시키기도 했다.“장사를 하던 사람들이 모국어로 글을 쓰면서 하와이, 캐나다 등지에서 교포문학 붐을 일으켰다. 다들 이태백도 아니고 종일 일하다가 잠시 시상을 떠올려 쓰는 시는 무리가 있다. 공부를 해야 한다. 남을 감동시키는 좋은 시를 쓰려면 많이 읽고 많이 써보아야 한다”고 전한다. 작년에 나온 그의 열두 번째 시집 ‘하늘의 맨살’(문학과 지성사)과 시작 에세이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비채), 서간집 ‘아주 사적인 긴 만남’(웅진지식하우스)은 요즘도 베스트 셀러이다.
▲언제부터 시를 썼을까
1939년 아동문학가 마해송씨와 한국최초 여성무용가 박외선씨 사이에서 출생한 마종기의 시 ‘아카시아꽃’은 중학교 교과서에,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강원도의 돌’이 실려있다.“초등학교시절부터 동시를 썼다. 부모님 영향으로 좋은 문학적 환경에서 자라나 중고등학교 시절 학원문학상을 타기도 했다. 아버지 친구분 문인들은 대부분 가난했고, 몰려와 술 마시고 하는 것이 마음에 안들어 문인이 안되려고 했다. 신문기자가 되고자 정치과를 가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의대를 가면 어떠냐고 하셨다”그래서 연세대 의대를 들어갔다. 성적은 상위권이나 주사와 피가 무섭고 수업도 재미가 없었다. 자연스레 문리대 백두진 시인의 수업을 듣게 되고 시가 좋아졌다. 본과 학생이 되어 해부학 시간의 새로운 경험은 삶과 죽음에 대해 눈과 손, 가슴으로 느끼게 했다. 그래서 쓴 시 ‘해부학 교실’이 1959년 백두진 선생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고 다음해에 첫 시집 <조용한 개선>이 나왔다.
마종기는 서울대 대학원을 마치고 군의관 시절, 재경문인 105인에 끼게 되고 65년 한일회담 반대 성명에 참여했다가 군인이 정치에 관련했다 하여 중정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그 결과 인턴으로 미국에 가기로 한 일정이 강행되었다.“1966년 조용한 시골마을 오하이오에 정착했다. 늘 피와 죽음 가까이 있다 보니 너무 외롭고 힘들어서 더욱 시를 쓰게 되더라. 그래서 당시 한국일보 기자이던 동생에게 한국일보를 부쳐달라고 했다”2주씩 모아서 보내주는 신문은 배로 운송되어 두달 뒤에 도착했는데 기사는 물론 광고까지 샅샅이 훑어보며 모국어의 갈증을 달랬다고 한다. 마종기는 생명이 태어나고 정을 나누었던 환자가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고통, 슬픔, 허망함을 다스리고자 그리운 모국어 속으로 뛰어 들어간 것이다.
“황동규, 정현종, 김병익, 김현 등 친구들이 시를 보내라고 계속 말했고 그래서 문학과 지성사 ‘문지시인선’ 시리즈로 마종기 시집이 나왔다.” 처음 한국에 나간 것은 5년만인 71년, 그후 76년, 80년대에 들어서 2년마다 가서 출판 관련 일을 보고 친구들을 만났다. 마종기는 1997년 제7회 편운문학상, 제9회 이산문학상, 2003년 동서문학상 등도 수상했다.마종기는 시 ‘꿈꾸는 당신’의 모델이 된 부인과의 사이에 세 아들을 두었다. 장남은 피츠버그대 안과의, 둘째는 미시건에서 변호사, 셋째는 피츠버그에서 파이낸셜을 하고 있고 손자가 5명,손녀가 3명이다.
“큰아들은 어려서는 한국말도 잘하고 송아지 노래도 잘 부르더니 초등학교에 가면서 한국말도 안하고 한국음식도 먹지 않았다. 대학생이 되어 한국에서 1년이상 있으며 정체성에 대해 정리한 다음 돌아왔다. 아이들이 한국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있어 자랑스럽다. 며느리 셋 모두 한인이라 다들 부러워한다”고.
“뉴욕, LA, 시카고 같은 대도시는 복잡하지만 맛있는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는 그는 미국에 아무리 오래 살아도 한국음식은 못버리는 토종한국인이다.“80년대 들어 한국에서 친구들이 강제퇴직, 조기은퇴로 일선에 물러나자 나만 잘 먹고 잘 살아도 되는 건가 하는 죄책감이 들었다”는 감성여린 시인 마종기, “마음 속 깊이 고국, 모국어에 대한 사랑, 한글에 대한 원천적 사랑이 있어 시를 쓰는 것같다”고 말한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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