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퀸즈카운티 법의청장으로 11년
▶ 한인 최고위직 공무원
회갑을 맞은 노용면 부부(앞줄)가 네 아들과 함께. 뒷줄 가운데는 둘째 며느리.
올해로 미국생활 52년째를 맞이한 노용면은 세가지 기록을 갖고 있다. 하나는 최초의 한인 법의관이며 지금까지 뉴욕시 공무원직 중 한인으로서 전문분야 최고위 직인 퀸즈카운티 법의청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개인적으로는 부인과 네 아들 모두가 의사라는 드문 가족이력도 갖고 있다. 부인 장신순은 은퇴한 일반내과 의사이며 장남 일선은 현재 뉴저지에서 신장내과의, 보선은 퀸즈에서 산부인과의, 삼선은 펜실베이니아에서 안과의, 4남 안선은 롱아일랜드에서 정형외과의로 각기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서 법의학이란 개념이 도입되기 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 조교로 있을때 법의학 시스템의 선구적 위치에 있는 미국으로 유학길을 떠난 것이 미국생활의 시초였다. 뉴욕대
의대에 다니며 법의학의 할아버지로 존경받던 밀턴 헬펀 박사 밑에서 훈련을 받았다. 헬펀박사는 미국 법의제도의 창시자로서 그로부터 직접 훈련을 받은 의사들은 어디를 가나 자부심을 갖게 마련이었고 노용면도 그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헬펀박사로 부터 전통적인 법의학 이론과 기술을 배웠고 그의 철학도 전수했다.
그때까지만해도 한국에서는 검시관이라고 부르던 직을 미국에서는 법의(Medical Examiner)라고 불렀다. 법의가 하는 일은 단순히 사람의 주검을 검사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법적인 분야까지 책임을 지는 직책이다. 미국에서 사람이 갑자기 숨질 때에는 누구나 경찰을 부른다. 이때 경찰은 일단 법의청에 통보를 하게 되어있다. 또 병원에 환자가 들어오자마자 사망해도 법의청에 통보를 한다. 행려병자가 사망하거나, 약물중독자의 사망, 산업 과실치사, 환자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약물을 잘못 써서 사망하거나 수술 도중에 사망해도 반드시 법의청에 보고를 하게 되어있다. 이럴때 통보를 받은 법의청(메디칼 이그재미너스 오피스)은 수사관을 현장에 파견하여 수사를 하고 부검이 필요한지의 여부를 결정하게 되어있다. 부검의 정도까지 결정하고 그에따른 수사권도 갖게되는 의사들을 통틀어 법의관이라 부른다.
뉴욕대에서 유학생으로 법의과정을 단기간에 수료하고 귀국하려던 노용면의 의지는 9개월후 뒤따라 들어온 부인이 임신을 하게되고 해산까지 기다렸다가 몸조리하는 과정에서 재차 임신을 하게 되고 3년간 연년생을 출산하는 바람에 아예 귀국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62년 캐나다 동부 뉴펀들랜드 주에서 법의청 책임자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매력에 끌려 이를 지원하게 되었다. 헬펀박사로 부터 3년간 배운 법의 훈련을 실천에 옮기고 싶었다. 이때는 이미 법의학 전문의 시험에 합격한 후였기 때문에 부임하자 뉴펀들랜드 지방병원 6개를 관할하는 주 법의청 책임자로서 중대한 책임을 떠맡게 되었다. 그때 나이 32세. 대우도 좋았거니와 쾌적한 환경속에서 정열적으로 일했기 때문에 캐나다에서의 8년 세월은 그에게 있어서 황금기나 다름 없었다.
뉴욕대 시절 작성했던 ‘마약으로 부터의 죽음’이란 논문이 뒤늦게 뉴욕주 저널 오브 메디신지에 실렸고 ‘올해의 논문’으로 금상을 받는 자리에서 은사 헬펀박사를 다시 만난 것이 뉴욕으로 귀환하는 동기가 되었다. 뉴욕시 법의청 부책임자 자리가 기다린다는 헬펀박사의 제의에 따라 8년반만에 뉴욕으로 되돌아온 노용면은 뉴욕시 법의청 어소시에티이트 이그재미너로 임명받아 웨스트체스터의 펠햄매너에 둥지를 틀었다. 이때 마련한 집에 노용면 부부는 42년째 살
고있다.
뉴욕시가 실시한 시험에서 만점 합격을 하고 부수석 법의관으로 진급하면서 죽음에 얽힌 여러가지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는 공을 세우게 되었다. 대수롭지 않게 보이던 흑인 남성의 변사사건, 살인누명을 쓴 매춘부를 무죄로 만든 사건, 부검으로 살인을 확인시켜준 하숙집 여주인 사건 등 각종 범죄를 해결하는 수사능력을 보였다. 그는 35년간 법의학 분야에서 체험한 사건 70여 케이스를 분석한 ‘자살이냐 타살이냐(Murder or Suicide)’란 제목의 저술을 통해 법의학
자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법의와 관련된 저술 4권 외에 논문 45편, 뉴욕의대, 코넬의대, 다운스테이트 의대 등 초청강연도 다녔다.
미국에서 법의제도는 카운티별로 구성돼 있다. 맨해튼, 브루클린 법의청을 거친 노용면은 1980년 법의들의 꽃이라 할수있는 퀸즈카운티 법의청장으로 임명받아 91년까지 11년간 재직했다. 그때까지 뉴욕시에서 한인이 오른 최고위직 공무원이었다. 법의관 생활을 하면서 그는 낙후된 한국의 법의제도 발전을 위해 각별히 신경을 쓴 흔적들이 많다. 선진화된 미국의 법의제도를 배워 한국으로 돌아가 이를 꽃피우려던 유학생 시절의 못다한 의지를 뒤늦게나마 실천하기 위해 기회가 허락하는대로 한국을 찾아 자신이 배운 법의학의 이론과 실제를 전수시키는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 검찰청 초청 강연에 여러차례 응했고 해마다
1명씩 미국에 파견되어 수련을 받는 한국 검사들을 여러면으로 도움으로서 한국 법의제도 정착에 힘을 보탰다. 때로는 한국에서 논란이 되는 어려운 케이스가 발생했을때 직접 날아가 자문한 적도 있었다.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그는 한인 커뮤니티 활동에도 관심을 쏟았다. 1960년대 퀸즈한인교회 (목사 한진관) 부설 한글학교 창설에 동참했고 서울대 의대 미주동창회장을 지내며 기관지 ‘시계탑’을 창간했다. 뉴욕지구 서울대 동창회장, 미주 한인의학협회장을 역임했고 이무렵 북한도 방문했다. 의학협회가 북한 의료진을 돕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을때 고향인 함흥을 찾으려 했으나 뜻은 이루지 못했다. 1929년 함경남도 함흥 출생인 노용면은 그곳서 영생중학꽈 함흥의대를 다니다 6.25동란을 만나 월남한 사연을 지니고 있다.
1991년 퀸즈법의청장에서 물러나면서 그는 오랜만에 법의를 개업했다. 의문사가 발생하거나 법적 문제가 있는 케이스를 맡아 요즘도 자문역할을 하고있다.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때로는 재판정에 나아가 법의로서 증언대에 서기도 한다. 요즘은 반 은퇴생활이지만 그는 평생 법의의 길을 택한 것이 의롭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역할로 인해 누명을 벗는 사람들을 대할때마다 남모를 보람을 느낀다. 조종무<국사편찬위원회 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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